인생 등단
-한유진-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고 귀찮다는 나약함에
생을 외면하고 묻어두기만 한다면
기억의 서재를 꽉 채운 기록물들은 낙서와 쾨쾨한 먼지로 가득 차
한 순간에 새벽 물안개처럼 스러질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어 납작 눌려버린 기억부터
몇 번이고 꺼내보아 귀퉁이가 다 닳아버린 기억까지
모두 다시 들여다보고 먼지를 털어 내보자
그 모든 기억의 습작들을 다시 읽고
펜을 들어
오탈자를 고치고
살을 덧붙이고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렇게 인생을 퇴고하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인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기억의 서재의 모퉁이에서
밤을 지새운다…….
스케이트장
차가운 얼음 위를 위태롭게 나아가고
엉덩방아를 찧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고
그러면서도 웃고 즐기는 곳.
미끄럽기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에 화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잘 탈까? 더 재미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곳
그곳이 스케이트장이고 우리네 삶인 것이다.
글의 강
내 안에는 너울거리는 강이 있다
그 강은 마치 거대한 뱀의 입처럼 범람해왔다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감정과 활자들은 나의 마음을 속절없이 휩쓸고
나를 익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 범람기의 끝에는 더 풍요로워진 내 삶이 존재했다
그렇다
내 글의 강은 나일강처럼 내게 축복을 주는 곳이었다
지나감
모든 것은 지나간 후에야
본질을 마주하고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게된다
너도 마찬가지였다
너를 사랑했던 시간은 폭풍의 눈 속 짧은 평화였다
네가 지나가고 감정의 위험반원에 들어 이리저리 쓸릴 평화
너는 내 모든 것을 가져가고 망쳐놓은 듯했으나
네가 완전히 지나가자 자욱하던 슬픔의 먼지들이 씻겨 내려가고
맑은 하늘은 내게 인사를 건 냈다
이내 촉촉한 대지에는 새 감정들이 움트고
이제야 나는 진짜 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랑의 사칙연산
나는 수학을 배웠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도 배웠다
자연수, 정수, 소수, 허수……
그런데도,
아무리 뺄셈을 해도 내 마음은 덜어지지 않았고
아무리 덧셈을 해도 네 마음은 더해지지 않았다
내 마음을 나누고 곱해주려 해보아도 되지 않았다
아, 사랑에는 사칙연산이 통하지 않는 거구나
그렇게 낡은 마음의 교과서한 켠에 나만의 정의를 적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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