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그림자도 곁을 떠나는 시간
시침조차 잃어버린 가운데
메마른 달빛 아래 외로이 섰다
어둠에 비비며 기다리는 시간
바람이 스며들어 내장까지 시리지만
포개지는 흑백 위로 팔을 뻗어보자
검은 도화지에 녹색 붓으로
서툴게 서툴게
오랜 꿈을 그리다가
마침내 무지개가 담기면
잎 끝에 맺히는 뜨거운 구슬
피어나는 별빛
시험문제
누구냐 넌
아니다, 우린 분명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3초간의 짧은 명상과 함께
우리는 약속처럼 마주섰다
지난 날, 새벽까지 눈을 비비며
미켈란젤로보다 위대하게 조각했건만
너와 나의 정적에 초침조차 숨을 죽인다
너는 냄새, 소리조차 없이 다가왔으나
나는 마치 일류 탐정이라도 된 듯
너를 한 문단, 한 글자까지 헤집으며 단서를 찾아본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막히는 혈류에는 짧은 소원이 흐르는데
어제 본 그 책장은 왜 하얗게 멍들어 있느냐
신의 계시라도 바라는 마음이지만
모세보다 정성이 부족했는지
아아, 이번에도 오랜 만남처럼
결국 추억만 남기고 돌아왔구나
취사
가끔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잠깐 쉬면서
밥솥에 밥을 안쳐보자
맑은 물 담아 쌀을 씻기며
소용돌이치는 백색 파도에
뿌옇던 마음까지 씻어내 버리자
처음보다 무거워진 무게
열기가 온몸으로 감싸 안으면
시간이 기일게 늘어진다
작렬하는 열기 속에서
백옥보다 빛날 수 있도록
오래도록 천천히 익혀보자
강한 압력 속에서만
하얀 쌀밥이 만들어 지듯
뜨겁고도 무거운 것이 참 닮아있다
조급해 하지말자
너무 오래 걸린다 싶으면
뜸이 들어야 윤기가 흐르니
시간에 갇히지 말고 잠시 숨을 고르자
이내 밥솥에서 기적이 울리며
앞을 흐렸던 김조차 도망가는
약속 같은 명작이 나올 테니까
급식어머니
어서와 더 줄까? 맛있게 먹어
서울시 강북의 재수학원 급식어머니들은
해가 중천이면 따뜻한 밥을 푼다
책 앞에서 합죽이가 되었던 아들, 딸들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앞에서 개구리보다 잎이 커진다
아침 이슬보다 먼저 깨어나
지하 주방에서 20명 남짓한 조리사란 이름의 어머니들은
매일 이렇게 1000명의 하루미소를 짓는다
어서와 더 줄까? 맛있게 먹어
월화수목금
하루의 시간을 잃어버린 채
한 달 꼬박 기계처럼 지은 밥에는
남편의 교통비, 아들의 등록금, 딸의 학원비가 서려있다
밥주걱으로 무장한 전쟁터
한숨과 한숨이 맞닿아 수평선을 넘어가면
황혼조차 들지 않는 지하에서 다시 1000명분의 식판을 닦는다
어서와 더 줄까? 맛있게 먹어
집에서도 낡은 녹음기처럼 되뇔까 두렵지만
이마에 흐르는 땀조차 어머니의 거룩한 숙명이라며
가족의 가계부를 가슴에 바느질했다
아, 스스로 숙명이라 이름 붙인 땀구슬은
은빛 주방에서 더욱 찬란히 빛나
뜨거운 밥에 사랑까지 담았구나
아침이슬
새벽 동산 오르는 길
누구보다 먼저 빛을 머금은 방울들은
햇빛보다 먼저 내 발목에 입을 맞춘다
어둠조차 삼키지 못한 기다림
새벽바람에도 흩어지지 않은 염원
이슬이 읽는 아침은 무엇보다 달콤하다
발끝에서 느껴진 차가운 문지름은
이제 가슴속 뜨거운 주무름이 되어
아침에만 피어나는 미소를 가르쳐준다
응모자 : 김용호
이메일 : ansaleks@naver.com
연락처 : 010-2840-4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