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사
산 그늘 깊어지는 고적한 산사
마음하나 기댈 곳 없던 비릿한 그리움
헹구고 비워낸 여백에
곰삭은 침묵의 시간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누굴 위하여
소낙눈은 눈치도 없이 더께더께 쌓이고
죽비 든 산바람만이
하얀 솔잎을 툭툭 털어낸다
꾀꾀로 노루 산토끼 까투리가
여린 동자 마음 훔치려 기웃거리다 가고
허공에 걸어놓은 목마른 풍경소리
숙숙한 달빛에 아늑히 녹아내린다.
초봄인연
까칠하게 설익은 소식이라도
한 꺼풀씩 한 꺼풀씩 꺼내본다
슬쩍슬쩍 건드리고 가는 매운바람에
채 아물지 못한 생채기
부드럽게 속살거리며 쓰다듬어주는
귀인 같은 볕살 꽃무늬
떠밀리듯 지칫거리며
비릿한 기억 애기하는 봄
찬란하게 분만한 대지를 울리며
아지랑이처럼 다소곳이 내미는 초록빛깔
부시게 화사한 꽃 매무새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찡한 인연이려니.
여명
하늘과 바다와 지평의 경계를 넘나드는
오늘의 갓밝기에
아린 눈동자 고정시켜 놓고
붉디붉게 가슴 뛰는 이야기 섞는다
내 안에 펄떡이며 끓어오르는 열정을
그대 뜻대로 녹일 것 같은 눈빛이 그랬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날밤이
무서워지는 까닭을
오늘 여미던 태양이 넌지시 답해 주련만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만큼
갈증에 여윈 내가 얼마나 더 깊은 기도를
천등에 새겨야 했을까
기다리느라 등걸잠 꿈에 뒤척이던 풀잎은
사치스런 꽃문을 바스스 열어젖힌다.
시나브로
꾀꾀로 내 속마음 촉촉이 적시던 는개
살포시 걷어내고
불콰한 노을에 곱게 채색된 기억의 편린들
시나브로 아슴아슴 되살아나는 환영에
눈높이만큼 골막하게 벙그는 그리움
드넓은 초록 밀밭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명지바람
시절따라 시나브로 애련하게 보듬어줄지라도
매운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 그늘
겉잠 꿈에 무지근해져만 가는 날밤
혹여 그대 아는가
곰살갑게 내 눈치 살피던 풋풋한 날들은
달그락거리며 성큼성큼 쓸리어가련만
어디선가 간드러진 웃음으로 기다릴 것만 같은
시나브로 아늑히 지펴지는 달달한 그대 향기
나는 어쩌나, 자꾸만 야위어가는 시각들.
달빛
살아오는 동안 어머니의 눈빛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다
어머니 닮은 만월을 중천에 걸어놓고
이제 내가 어머니를 바라보듯
가슴 저민 달님을 읽는다
어머니는 만월 중에서도 슈퍼문 이었다
백수를 남겨놓고 요양병원으로 가신 어머니
아직은 내 얼굴 기억하며
달빛 같은 미소를 건네주지만
기억의 세포는 하나 둘 무너져 간다
바람에 일렁거리는 달빛은 어머니 목소리
달빛에 반짝이는 물빛은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와 건네주는
깨알 같은 편지였다.
박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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