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회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 동시 외 4편.

by 본투비블루. posted Mar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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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하얗고 널찍한 1인실에

생명이 아지랑이 펴가며

누워 있는 노모를 보며

아들은 생각했다.


이 방의 크기는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

고시원 방의 4배 크기

내 삶 노력의 산물.


아들은 생각했다.


아버지께도

못 해 드린 가시는 길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이 정도면 괜찮은 마지막이라고  


삐-소리와 함께 노모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아들은 이제야 편하게 울었다.


가는 사람에게도

남는 사람에게도

괜찮은 마지막 같은 건 없었다.


엉엉, 하지만 작게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걱정되어

구천이라도 떠돌까 겁났다.


아기 같던 울음이 점점 더 커졌다.

아들은 자신의 소리가 아닌 것을 알고

놀라서 울음을 멈췄고,  건넛방에서 

태어난 아기가 최대 출력을 내는

삶의 첫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모의 희미하던 마지막 숨이 멎고

아기의 우렁찬 울음이 시작되었다.


아들은 건넛방에 뛰어들었다.

주변 사람의 만류에도 유리창 너머

아기에게 외쳤다.


"엄마 이번 생은 엄마를 위해서 살아!

결혼도 하지 말고 그 좋아하던 이선희 같은 가수가 되는 거야! 사랑해".


아기는 울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고뿔 샤워>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

모든 이의 매일을 씻어 내고

샤워실 하수구를 시작으로

여러 순환을 거쳐 하늘까지 닿았으니

방울방울 마다 사연이 있겠으나

일일이 귀담기에는 온도가 낮다.

시원하게 맞아들이고 싶었으나

고뿔이 무서워 우산을 쓴다.

세상의 한 해가 씻겨 나간다.

지하 가득 고뿔이 찼다.


<0.5mm를 2분 뒤에 사랑한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머릿결

헤어 에센스를 바꿨구나.

예사롭지 않게 각이진 눈썹의 끝

어젯밤 샤워 후에 정리했겠고

자꾸만 뒤로 빼는 그 하얀 왼손은

네 번째 손가락, 까진 네일을 감추려는 거지.

앉을 때마다 입을 오므리며 힘을 주는 건

그 조금 있는 뱃살이 신경 쓰여 그리하는 걸 알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냐.

네 앞머리가 0.5mm 줄어든 것을

그저 앞머리를 자꾸 만지며 강조하는 너를

좀 더 보고 있는 게 즐거워.


짓궂지만 2분 뒤에 말할 게 

 "앞머리 잘랐구나".

그러니 무드 없게 

"나 뭐 바뀐 거 없어?"라고 

먼저 묻지는 마라.


만나는 순간마다 맹수처럼 

조용히 너에게 숨어들어 너를 관찰해.

너의 표정, 너의 기분, 너의 상태.

더불어 너의 그 모든 작은 노력까지 사랑한다.


 <산사람>



마음의 창이 깨짐과 동시에 모든 파편이 내게로 날아와

정확하게 모든 급소를 관통하여 치명상을 주었다.

내쉬는 숨마다 추억 가루와 혈액이 범벅되어

쿨럭이니, 이야말로 가망 없는 것이 아니냐.

마음이 멸한다고 실제를 이루는 고깃덩어리가 죽는 것도 아닌데.

왜 시체 보듯, 체념한 눈물만을 내게 보이느냐.

이렇게 심장이 뛰는 나는 산사람.

그깟 감정이 무어라고 껍데기에 상처 하나 없이

나를 이리도 비참하게 하는가. 


<묵묵히 같은 인간이어라>


제 어미의 피와 살을 찢고

제 아비의 맘과 정을 찢고

제 부모의 삶과 탐을 찢고


세상에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나


구르고 심히 모질게 살지라도

못 배우고 가난하게 살지라도

후회 가득한 불효를 걷더라도


마지막까지 기력이 쇠한 부모 곁에 머물며

작은 농지거리로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다면


사회가, 문화가, 나라가

패배자라  손가락질 해도

너는 묵묵히 같은 인간이어라.


좀 투박하더라도 줄기가 있으며

뿌리를 위해 물을 끊지 아니한 너에게

참 예쁜 삶을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부모의 무덤 한가운데

할미꽃 한송이 피거들랑

너무 작은 보상이라고 섭섭해 말아라.


먼저 간 혈육이 다음 생에도

너와 인연 닿게 해달라는 약속의 증표니


세상 다 무시하며 잘 살아도

사랑하는 이,

죽어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

너보다 값지겠느냐.


하늘의 기준에 삶에 무게와 부피가 없어

누가 더 잘, 잘못 살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너 예쁜 삶으로 피었다고

나 다시 말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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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율구

yulgu9@gmail.com

010 3887 5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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