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달 지기 전, 해 뜬 날
낮달 뜬 날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들은 곁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해와 달은 반대말이 아니라는 걸
서로의 간격을 좁히려
자신의 곁을 내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걸
일식은 누가 누구를 가리는 게 아니라 실은
해와 달이 두 손 마주 잡는 날이라는 걸
일 년에 단 두 번, 그들은 서로 만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는 걸
첫사랑
청혼했었던 그녀 모습이 흐려져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거절도 승낙도 하지 않았었다
창 너머 밤의 강변도로에 용암이 흐른다
창유리는 조금씩 흐려졌다
골방에 처박혀 창문이 흐려졌음을
알지 못했다
계속 써달라고 보채는 백지를 설득 중이다
그녀 모습이 떠올라야 쓸 것 아니냐고
무너져 내리던 봄날의 기록
임신한 벚나무 허연 둥근 배 내밀었다
벚나무의 전성기인가 생각했다
예보에 없던 폭우 쏟아진 그날
비바람에 몰매 맞아 사산한 그날
젖은 벚꽃잎이 호외처럼 흩날렸고
비 맞고 두리번거리던 우산 없던 아이
떨어진 벚꽃잎 밟지 않으려 옆으로 피해갔다
아이는 미처 울지도 못했다
입춘 지나지 않은 절기
오지도 않은 봄에 벚꽃은 피고 졌으니
이젠 때만 되면 사타구니 벌려 진분홍 음부 드러내는 벚꽃이 무섭다
열매
내가 사는 마을엔 오래된 나무 한 그루 있다 수령이 삼사백 년은 됐을 거라고 등 굽은 노인들이 말했다 해마다 사람들은 그 당목 앞에서 상을 차려 제를 올렸다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큰 부자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근심 걱정 없게 살게 해달라고 이 기도가 이 나무에 열릴 열매처럼 결실을 거두게 해달라고 그들은 빌고 또 빌었다
어느 날 그 나무 앞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마을에 다리 성한 사람들은 모두 모여서서 고개 쳐들고 나무 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에는 흰 두루마기의 여자 시체 하나가 주렁 열려 있었다 얼마 전 제사 때 누구보다 열심히 소원을 빌던 감나무집 여자였다 사람들이 시체를 보며 수근거렸다 제사 때 정성이 모자랐다느니 산 제물을 바쳤어야 했다느니 저 여자가 제물이 되었으니 이제는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 제사는 언제 어떻게 지내야 한다는 논의가 한동안 여자시체 밑에서 이어졌다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사람들은 웅성거리다가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유언
화장해라
생전에 내가 시 한 편 쓰게 된다면
부탁한다, 작은 돌 하나 주워 그 시를 새겨주고
날 그 돌 밑에 뿌려라
아무도 읽지 않을 내 시가 바다를 바라보게 하라
아직 쓰지 못한 내 한 편의 시는 분명 바다가 태생일 테니
하나 더 부탁한다
눈 내리면, 내 시 위에 쌓일 흰 눈을 그냥 둬라
눈이 내 시를 더듬다가 녹아 울 수 있게
그러마고 약속해라
그러면 나 죽기 전에 어찌어찌 시 한 편은 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