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영식씨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 우체국 직원, 영식 씨는 이상하다
큰 아이 낳고 귀저기 삶는 들통 번쩍번쩍 들다,
인대 늘어나 구급차에 실려 간 내 아픈 손목도 모르면서
성큼성큼 걸어와 소포 보낼 박스를 만들어 놓고는 책을 담는다.
일본에 있는 남편에게 책 보냈다고 전화했더니,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아파트 오르락내리락
책박스를 혼자 날랐던 남편의 휘청이던 허리도 모르면서
도와줬다는 키 크고 젊은 남자, 이상한 영식씨
움푹패인 아스팔트 덜컹거리며 저무는 한세상
함박눈이 내린다
쌓을 수 없는 세상살이
애잔한 등허리 어루만지며 쌓이고 있다
서울에 소포 보내려 들른 우체국,
옹이진 세월을 밀고 오는 할머니의 손수레 끌어주니
강원도, 전라도로 시집간 딸들에게 보내는 김장김치라 한다.
우체국 문을 열자 곱은 손으로 꺼낸 사연들
눈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할머니 뒤에서 기다리는데
영식씨가 할머니 대신 주소를 하나하나 적으며
“할머니, 눈 오는 날은 저희 같은 사람들도 다니기 힘들어요
이런 날은 다니지 마세요”
아들같은 목소리에 기울어가는 허름한 시간 아늑해진다
흔들리고 깨질까, 테이프로 한번 더 붙여주는 영식씨
할머니의 눈길 담은 사랑을 묵묵히 받쳐주고 있었다
부르트고 갈라진 밑바닥 덮어주는 하얀 세밑
저마다의 주소 찾아 수북하게 빛나도록
영식씨의 꾹꾹 눌러쓴 삶이
깊고 깊은 하늘을 퍼내고 있다
대숲의 아침
1년짜리
6개월짜리
3개월짜리
능력도 성품도 짜리가 되어가는 계약직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기간제 인생이라는 말이
흰가루를 날리며 뚝뚝 부러졌다
푸른 힘줄로 뻗는 강물에 식지 않은 재로
흩날리는 것은 햇살이었다
물살을 타듯 쑥쑥 자란, 궁근 나무는
울지 못하고 태워야하는 해의 몸뚱아리를
아침이면 뒤끝도 없이 일어서는 속내를
오래지 않아 알아챘다
늙지 못하는 태양이
밤이 되어야 시래기빛 칠판을 끌고
채워지지 않는 대궁 속에 잠긴다
인내로 말아쥔 마디마디
흔들리는 통증을 끌어안는다
나이테가 되지 못한 허기진 허리로
벼랑끝을 올라가는 아슬아슬한 길
바람을 맞으면 바람을 업고
애면글면 보이지 않는 저편, 흘려보내라는 뜻을
단단한 슬픔으로 서서 깨달았다
움켜쥔 손을 펴자,
구멍같은 삶으로 밀려오는 하늘
차고 넘친다
바람의 후일담을 들으며 한결 가볍고 풍성해진 숲
쌀뜬 물빛 일렁이며 여명에 닿는다
모락모락 달큰하게 뜸 들이는 시간
굳은살 박인 등 위로
붉은 꽃이 고슬고슬 고봉처럼 떠오를 것이다
사쿠라(佐倉)의 봄
인터넷으로 주문한 윤동주 시전집
스물 여덟, 뺑소니차에 치어 떠난
큰오빠의 비망록처럼,
현해탄 넘어 내게 왔다
4남매가 눈에 밟힌 아버지, 눈뜨고 돌아가신 후
아빠처럼 믿었던 오빠를 꽃상여로 보낸
열아홉 소녀는
유리창 넘어 스멀스멀 기어와
시퍼렇게 꿈틀거리는 어둠을 먹어치웠다
멀미같은 미래를 게우고
불안과 두려움
꾸역꾸역 먹다 쓰러지면
새벽 찬기가 잠든 이마를 짚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시를 쓰자던 별 하나
허공에 푹푹 빠지며 걸어가던
적막한 계절의 집은 기울고
웅성거리는 밤이 살청의 창을 빠져나갔다
해의 기나긴 추억을
화석처럼 새긴 벚꽃 나무 아래
달 속에 숨었던 봄이
시집을 읽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생이 머문 자리
글썽이며 침묵으로 버티던
어깨에 쌓여 꽃담을 이룬다
떠나간 겨울의 벗은 허물과
언어를 잊은 꿈들을 쓸어 담는
손에서 하늘 물고 피어나는 잎사귀
귀향하지 못한 달이 비추고 있다
발자국에 고인 눈물 같은 내 시를
흑백사진
수줍은 청년의 아리랑
낮게 퍼지는 우지(宇治)강변
1943년 쿄토의 하늘은 물빛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강이 흐르고
느리게 열차가 떠나간다
못처럼 빛나는 명동촌의 십자성
소년은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지워지는 푸른집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바다까지 뻗은 녹슨 철로를 버티는 햇살은
영원히 슬퍼할 것이며* 바람을 마실 뿐이다
펄럭이는 허공으로 닿은
해란강 치맛폭에 별을 수놓는 어머니
어쩌면 다시 못 볼 것 같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경적소리
덜컹 덜컹
멀어진다
침몰한 사랑 안에 둥지를 튼 하늘
붉은 살점, 핏물 번지던 자리
풍화하는 곡조에 실려
못자국을 맴돌고 있다
* 윤동주의 시 ‘팔복’에서 차용
사쿠라(佐倉) 언덕의 노을
서민경
숲으로 가고 싶었지만
막다른 골목이 와서 기다리고
안개가 먼저 길을 감추어
서성이던 눈동자
착륙한 어둠의 깃털이 사향을 나부끼자
활짝 열리는 그녀의 낭떠러지
푸드득
비명의 뻘 속으로 사라진다
목졸린 하늘에서 밤의 발톱이 번뜩였다
엄마 손 붙잡고 교회에 다니고
크리스마스,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당신이
먼 길 돌아 온 예배당
휠체어 탄 어미가 굳어가는 손으로
꽃한송이 떨어 뜨린 예배는
꽃물 들어서
화장터 가는 길
종소리만 태연한 세상을 떠돌다
하늘 난간에 주저 앉는다
허리잘린 생애, 애증으로 타오른
관자놀이의 바람이
나리꽃 물든 벼랑을
끌고 가는 알싸한 저녁
언덕 위의 교회 종탑이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서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