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회 한국인 창작문학 / 이소현

by 이오 posted Jun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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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

 

눈이 내리는 밤이면 아버지는 10킬로

갈빛 비료포대를 길목마다 쌓아놓고는 했다

 

깊게 가라앉은 발자국을 따라 물들던

누런 땀방울은 하얀

눈송이를 조금 녹이고는 해서

다시 떨어지는 눈은 온전히 그림자를 덮지 못했다

늘어나는 주름살 따라 해마다

낡던 땅은 한 포대

비료를 더 마시고는 했다

늦둥이 외동딸의 책가방을 위해선

삼만원 비료는 아무것도 아니라던 아버지의 어깨에는

언제나 검은 지게자국이 길을 닦고 있었다

 

한 해, 한 해

쌓이던 비료포대는 벌써

육십을 무장하고 있었다

 

낡은 고무장화는 이제 밑창이 까졌고

오래된 밀짚모자는 갈라진 짚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육백 킬로 짐을 인 어깨는

눈송이 사이를 꼿꼿이 지나고는 해서

작은 밭 한켠에 쌓은

오백그람 질 좋은 황토 빛깔 흙들은

투명 비닐 팩에 담겨 언젠가

숨 쉴 날을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늙어가는,

찌꺼기 밭을 메운 흙은 자꾸만 검게 닳아갔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유년

 

골목을 굽이굽이 돌다 마주하는 오래된

가게에는 간판이 없었다

낡은 마을 깊숙이 감춰진 가게의 주인아저씨를

동네 아이들은 언제나

옥수수 아저씨라고 부르고는 했다

쪼그려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이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고르라 해놓고 늘 본인이 고르시던

겉은 뻥튀기에 속은 슈크림을 얼린

옥수수 모양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쯤이면

집으로 가던

엄마들은 늘 삼백 원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 가고는 했다

 

밀물처럼 어둠이 불쑥 좁은

마을을 덮을 때면 거리를 쓸어 담던

아저씨는 홀로 남은 밤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

간 삶들을,

엮어내고는 했다

 

마을 입구를 메운 쓰레기통으로 어렴풋이

해가 떠오를 때면 비추는

똥에서는 연기가 나기도 했다

강아지 똥도 아닌 사람 똥에

으레 놀라고는 했지만

옆에 놓은 백삼십 원 공병을 줍는 할머니는

낡은 약국 봉투로 똥을 치우고는 했다

 

낮은 지역에 뜨는 해는 따뜻하다는 걸

기억하는 날




물 속 잠긴 도시

 

하늘을 오르는 물거품은 점점 커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에 잠긴 세상에는

해가 너무 멀리 뜬다는 사실을 알던 날이었다

 

오물거리는 입을 재촉하며

걷는 걸음은 퇴화된 지느러미처럼 느리게

흩어지고는 했다 파도는

낮마다 햇빛을 몰고 가버리고는 해서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마다

도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얼굴로 메케한

한숨을 뿜어내고는 했다

 

소원을 버려야 살 수 있다는 도시는

어두운 그림자로 입을 막았다

바쁘게 헤엄치는 파도가 짓이긴 것은 오르는 거품 한 줌

 

금방이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고향 행

열차를 끊어 달려가고는 싶었지만

그림자는 쉽게 벌어지지 않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건 가벼운 공기방울뿐이었다

 

자꾸만 커지는 물거품은 수면에

닿으면 죽어버릴 거라고 중얼거리며

어쩌면 죽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돌릴 때면

눈으로 들어오는 건 지독한 어둠

일렁이듯 차오르는 잔뜩 일그러진

거리뿐이었다

 

수면을 닿은 공기방울은

태양까지도 힘차게 오르고 있는데




어제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허공은 부유하는 단어만 담고 있어

 

하늘을 씹는 사람은 분명

제 꿈을 이룰 거라 하지만 질긴

공간은 아무도 삼키지 못했어요

아직 끝나지 않은 어제의 이야기

반복되는 낱말들은 단단하게 언 아이스크림 같아

달콤한 듯 했지만

진득한 얼룩을 늘어뜨리고는 해요

 

억울하게 날갯짓하는 까마귀는 마냥

검은 털을 털어내고 있어요

의미 없이 돌아가는 자전거 바큇살 같은 인생은

헛감켜 어쩌면 지친 브레이크를 타박하는 중이나

옆집아이가 뱉어내는 울음만큼

커질 것도, 서러워질 것도 없는 삶의 자국은

공중에서 피어난 밤을 닮아

그림자만 남긴 채 사라졌어요

 

바람은 연민처럼 불고 있고

하얀 새가 날아간 저녁을 지키는 까마귀는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울음을 지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어제의 이야기가 계속될 때에




그대는 거기에 있어요

 

그대는 거기에 있어요

스치는 바람이 설핏

그대를 잊고 지나쳐갈 쯤

아스러지던 머리카락이

그대의 뒷모습을 훑을 때면

입술은 물들고는 했어요

핏빛 색으로

 

밤은 이윽고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되새김질해요

나는 길을 벋어나고 싶지 않아

그대가 길을 잃을 것 같은 날에는

스치는 바람으로 발목을

휘어잡아 줄 테니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그것은

어쩌면 목은 휘감기도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면

그대는 묵묵히 그 길을 걷기만 해요

 

언젠가

그대가 걸어온 이야기가 들릴 때면

나는 그대 가는 길마다

하얀 꽃잎을 흩뿌릴 터이니.

 

그대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요






응모자 성명 : 이소현

이메일주소  : leesohyun11@naver.com

 HP 연락처   :  010-8956-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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