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차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 아우의 잔 외 4편

by 전화기를꺼놔 posted Jul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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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의 잔



거, 형님 기억하시오?
우리는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지 않았소.
우리의 겨울은 늘 살갗이 허옇게 일어났으며

우리의 하루는 늘 해가 짧았었던것 같구려.
몰락이 너무 이르게 찾아온 덕에 남들 그림자도 겨우 밟지 않았소?

성공이란 극지처럼 멀게만 느껴져 나 홀로 흐느낄때마다
형님은 내 손을 가만하게 잡아주었소.

하지만 난 형님에게 해준게 없구려.

고작 술 한잔 따라주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구려.
형님 아우 잔 받으시오.
지난 과거들 훌훌 털어버리고 한 잔 하시구려.




먹물



젊음은 흰 옷과 같아서 자국이 쉽게 남는다.

사랑도, 이별도, 아픔도, 기쁨도 더 선명하게 남는 이유

우리는 아직 흰 옷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안에는 수많은 자국들이 생기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지우고 싶지 않은 자국은 단연 사랑으로 인한 것이리라.





벼락같은 동정


공기의 발자국이 허공에 선명하게 찍히던 어느 겨울 밤.

코로 몇 번의 숨을 내뱉는지 남들에게 들키는 것이 창피해

빨간색 목도리를 한껏 둘러매 코를 감쌌다.

그 두꺼운 뜨개실을 뚫고 알싸한 풀 내가 느껴졌을 땐

이미 버스정류장 한 귀퉁이에 쭈그려 앉은 할머니를 발견한 후였다.

낡고 얇은 보자기를 몇 번 이나 덧대어 묶었건만

틈새로 삐죽 튀어나온 쑥은 감추지 못했다.

손이 시렵지도 않으신가 맨손으로 저걸 바리바리 싸들고 가시네.

촌스러운 꽃무늬가 가득한 화려한 패턴의 스카프는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을 겨우 덮고 있었다.

지금은 쓰지 않는 색 바랜 폴더폰이 할머니의 목에서

때 묻은 목줄을 통해 간신히 달려있었다.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자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보자기를 내려놓으시곤

다소 격앙 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이 할미도 보고 싶다며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놓겠다고 하셨다.

중간 중간 몸을 흔들며 손을 무릎위로 가볍게 내리치는 걸 보니

아마도 손녀딸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견딤이 가득한 삶을 사셨을 할머니의 주름 진 손에서

분명한 희망이 보인 건 그때였다.

아직은 그 주름이 너무 깊어 희망이 속에서 나올지 못할지언정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분명한 기쁨이리라.

봄이여 어서 오라.

주름 진 손 차지 않게 봄이여 어서 오라.





밑바닥에서 아빠로부터



내 생을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가난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몰아세웠다.

밀려오는 절망을 한 끼 때우 듯 집어삼켰더니

절망은 어느새 비겁이 되었다.

수천 개의 바늘이 나를 찔러왔지만

행여나 내게 꽂힌 바늘이 네게도 닿을까 그것이 더욱 아팠다.

피가 철철 나는 것 보다 두려웠던 건

발가락 끝 언저리부터 비겁이 차오르는 것 이었다.

바람과 맞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 무수한 벼랑 끝에 서보았다.

그때마다 코끝을 찔렀던 건 시원한 바람이 아닌

마른 생선 뼈 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였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지만

어둠은 내 몸을 비틀거리게 하여 너를 놓치게 할 것 같았다.

딸아

가령 넘실대는 은빛파도가 보고 싶거든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들어라.

부디 이 아비가 서있던 벼랑에 발도 딛지 말거라.

너는 부디 오롯이 행복하고 행복하여라.





기꺼이 괴팍해졌다


춘은 괴팍하며 동시에 퍽 아름답다.

화장을 안 해도 빛이 날 나이는 지났지만 화장을 하면 빛이 날 수 있는 나이.

그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부끄러워하던 나이는 지났지만

그 사람의 눈을 보며 대화 할 수 있는 나이.

하지만 어른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덜 여문 가을 같고

겉은 잘 익어 보이지만 속은 떫은 감이다.

그럼에도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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