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작] 사막을 걸어간다 등 5편

by 무즈엔무즈엔 posted Aug 09,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첫사랑

 

 

첫사랑은 한 번 뿐,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단 한 번의 도끼질이

영원의 나무를 쓰러뜨리니까.

 

쓰러진 고목나무 한 그루

한 세계를 이루며 그곳에서

내 모든 사랑들,

길러내고 있으니까. 

 

 



관 속의 기타

 

 

저 낡은 기타는 퉁겨지길 원했을까?

이렇게 저렇게 지판을 눌러주길 바랬을까?

둥그런 울림통을 두드려주길 원했을까?

메이저 코드에 기뻤을까?

마이너 코드에 슬펐을까?

목청껏 울다가 기타줄이 끊어지길 원했을까?

처음으로 줄이 끊어졌을 때

가죽케이스 안에서 영원히 쉬고 싶지 않았을까?

탱탱한 새 줄로 교체되었을 때 좋았을까?

팽팽한 줄의 장력이 낯설지 않았을까?

제가 내는 소리에 만족했던 적이 있었을까?

 

지금 화장터로 향하는 저 관속의 여자는

신장이식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 죽여 달라고

불협화음으로 노래했다고 한다.

남편의 손을 생명줄처럼 움켜잡고서......

 

기타는 또 한 번 울어보고

싶었을까?

재가 되어 돌아온 기타를 앞에 두고

상복 입은 기타들은 마이너로 울고 있다.

 

 

 

 

 

 

    



아가미 속의 사막

 

 

바람이 불어온다.

사막을 걷고 있다.

모래가 너를 묻는다.

이 세계의 자그마한 시도인 너를,

이 세계의 어쩔 수 없는 한 조각 기억인 너를,

그러나 세계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 꺼풀 덮이면 한 꺼풀 헤치고 나오는 미련,

아마도 저 모래무덤에게 너는

씹어 삼키기에 너무 크고 단단한 알갱이였을 것이다.

당황한 사막은 아픈 잇몸을 어루만지며

너를 도로 내뱉는다.

 

바람이 불어온다.

사막을 걷고 있다.

사막은 바다의 화석이므로

모래바람은 조류의 기억을 따라 불어온다.

고래의 지느러미가 휘저어놓은 궤적을 따라

소용돌이친다.

일출이 숨을 내쉬고

일몰이 숨을 들이쉰다.

시간은 피 흘리는 두 태양의 숨결 사이에서 일렁인다.

너의 몸은 모래밭의 부력 속에서 무게가 없다.

 

바람이 불어온다.

사막을,

사막을 걷고 있다.

걸음은 꿈을 발전(發電)한다.

너무 무거운 꿈이

너에게로 쏟아진다.

작은 시도인 너를 지운다.


그러나 무슨 아픈 기억 같은 너를,

끈질기게 비집고 나오는 반짝이는 통증 같은 너를,

세계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둠에게

 

 

드센 태양은 이제 물러갔다.

온몸이 심연인 어둠아,

들소처럼 달려드는 남성처럼

몸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빛 때문에 얼마나 아팠니?

네 배 환하게 부풀어 오르는데

찢어질듯 한 살갗으로 푸른 척,

명랑한 척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고

네 주둥이 물고 늘어지는 태양 때문에 너는,

저 지평선에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았니?

아직도 네 검은 입술 끝에

선명한 이빨자국 남아있다.

 

태양은 이제 사라졌다. 어둠아,

텅 빈 네 동굴 속에 폭압의 기억들이

별들로 돋아나고 보름달로 꽃피었다.

이제 그 잔디를 등에 깔고 누우렴.

그 꽃을 끌어안고 네 사랑을 만끽하렴.

 

나는 눈을 감아 빛을 몰아낸다.

한 여자가 거기,

제가 낳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다.

 

 

 

 

 

 

 

 

 

 

 

 

 

 

 

 

프라하 모텔의 가을

 

 

뒷골목이 환하다.

가로등불빛이 빨갛다.

프라하 모텔 간판 테두리에 알록달록 전구들

꽃잎처럼 화사하다.

젊은 남녀 한 쌍,

모텔 밖으로 나와 말이 없다.

들어갈 땐 취하고 들떴었는데

청춘이 들쑤신 몸속의 벌집이 바글바글 했었는데,

시무룩 폰 번호를 교환하고

봄여름이 돌아선다.

 

골목 끝에서 불어온 가을바람이

축 늘어진 치맛자락을 힘없이 들춰보고

휑한 바짓가랑이를 맥없이 쓸어본다.

프라하 모텔은 아직도 봄처럼 깜빡이는데,

이렇게 소동이 끝나버렸다고,

아무 일도 안 벌어졌다고,

바람의 뒷덜미를 부여잡고 낙엽이 구른다.

투덜투덜, 투덜투덜투덜......

 

발정기 지난 암컷 고양이 한 마리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조막만한 새끼들을 이끌고 떨떠름

모텔 앞을 지나간다.


이정화 / 010 9095 1062 / jh8426@hanmail.net

 


Articles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