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국
고건일
누런 메주콩이 되기까지
흙바닥도 마다 않았고
뜨거운 햇빛을 얼굴로 받고는
푸지게도 영글더니
커다란 양은솥에서도
훈기에 푹푹 제 몸을 삶은 놈
포대에 담겨서도 매질을 당했지
네모 반듯한 삶으로
앞집의 처마 밑에도
옆집의 베란다 빨랫줄에도
새끼줄에 매어달린 생
이제는 할머니의 품내처럼
후덕한 국물이 되어
세상 속쓰린 우리네 창새기까지
보듬으려 한다
하나 둘 나이 먹어가듯이
된장국에는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고통이
푹 끓여진 것 같아
또 생각나는 가족이 된다
공단 주민
고건일
아파트 단지 공중전화 주변에는
우리보다는 조금 검은 빛깔의 아저씨들이
햇살과 더불어 하고 있다.
알 수 없는 말들이 낯설다 못해
화가나 싸우는 것처럼 매섭게 들리면
난 이내 종달새 걸음이 되곤 했다.
“제 네들은 어째 여기서 모여 있어 시끄럽게”
“냄새 참 묘하네”
이웃집 아줌마들의 얘기를 혹여나 알까 몰라
검은 빛깔 아저씨들은 귀보다는 눈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새벽부터 우루루 나가서는
저녁 햇살이 조금밖에 없을 때
천근만근의 어깨와 다리를 이끌고
공중전화 주변에 모이는 날
아줌마들은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검은 빛깔 아저씨들은 햇살과 더불어 하고
나는 종달새가 되고
막내 삼촌은 베트남으로 맞선을 보러가고
또
귀보다 눈보다 가슴으로 알고
일을 나가고 돌아오고
숙모를 데리고 온 삼촌은 결혼을 하고
이렇게 모여든 우리는 공단 주민이 되었다.
마 당
고건일
가끔 맨발로 뛰어나오던 마당에는
취나물이 바람을 쐬거나
실치가 고추장과 한 낮 햇볕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살살이로 불리던 강아지는
내 친구가 되어주었고
할머니는 누룽지에 설탕을
소올솔 뿌려 간식으로 챙겨주던
모두가 함께 있을 수 있던 큰 마당
오랜만에 찾은 옛 집엔
다리 잃은 툇마루와
너무나도 작고
허름해보이는
마당이
끊긴 영화필름처럼
주인공과 조연과
엑스트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강
고건일
할머니의 두툼한 손이
어제처럼, 그제처럼
홑이불 속 아랫목에
또 가있다.
마치 지금도 그 속에서
뒤척이고 있을 것만 같아
아랫목을 쓸고 또 쓴다
‘핵교 다니는 애덜도
모조리 나가야 허요‘
면장놈의 말 듣고
허공이 되어버린 아들녀석
삼팔선이 그어져도
몇 십년이 흘러도
멈추지 않는
쓰디쓴 시간들이
할머니의 가슴팍 일텐데
‘괜차너요. 괜차너요.
태극기를 보면 울 아고
애국가를 들으면 울 아 소리니께
이자는 내자식이 아니라
나라의 자식이니께‘
먹먹한 혼잣말이
큰 강 줄기 따라
도무지 멈추질 않는다.
치매
고건일
당신은 어느새 뒤로 걷고 있습니다.
발걸음은 일정하지 않지만,
당신은 조금씩 뒤로 걷고 있습니다.
꽃피운 당신의 얼굴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식의 낙서로 자글자글
늘어만 가는 실타래는 그대로지만
당신은 조금씩 뒤로 걷고 있습니다.
어린 새싹처럼 되돌아가며
반복되는 물음과 궁금증에
당신은 조금씩 뒤로 걷고 있습니다.
‘나도 그랬겠지?’라고 독백하며
당신의 발걸음이 힘들지 않게
옆에서, 그저 옆에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조금씩 뒤로 걷고 있습니다.
고건일 / rhrhrjs12@nate.com/ 010-9968-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