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 반, 노을 냄새
다섯 시 넘어 해가 뉘엿뉘엿
마지막 숨결 깊게 내쉴 때
그림자는 연회색 키다리 아저씨가 되고
진해진 내 마음 알 곳 없는 고향으로 향하네
고층 아파트 일층 입구에 들어서면
차가운 대리석 싸늘한 공기 너머
어디선가 저녁 김치찌개 냄새 날릴 듯
시끌벅적 아이들 재잘거림 조금씩 줄어가고
어릴 적 젊은 내 엄마 그리운
오후 다섯 시 반
라디오의 지나간 옛 노래 사이
그래 이제 내가 마흔이구나, 뒤늦은 깨달음
노을이 지나가는 지금
노을 냄새 물들어 이유 없이 서글픈 내 마음
야근
여섯시 회의는 딸아이 웃는 모습 멀어지게 하고
여덟시 컨펌은 딸아이 아득한 냄새 그리워지고
아홉시 작업은 그리운 딸아이 안아보고 싶게 하네
내 젊음은 야근과 함께 날아가고
내 아이 아기 모습은 내 기억에 담지도 못한 채 지워져 가네.
냄새도 모습도 보드라운 살결도
멀리멀리 떠나가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보고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듯
내 모든 걸 앗아가는 시간
지금은 열시
모두 타고 재만 남은 내가 퇴근하는 시간
아파트 내 고향
억지로 무너지고 있는
삼십년이 지난 아파트
그 거리를 지날 때마다
어린 시절 나를 그리워한다.
내가 내 딸만 했을 그때
엄마는 이곳이 천국이었다.
반지하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청약이 당첨되었다며
방 한 칸이던 그 집에서
다섯 가족 드러누워
몇날 며칠 웃었겠지.
무너지고 있는 지난 추억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향이 사라지는 듯 가슴이 시리다.
연년생 다섯 살 여동생과
개미잡기 좋아하던 세 살 남동생
젊었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서지는 아파트 먼지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간다.
이젠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아파트 내 고향
이젠 안녕
그 물에 빠져 죽다
널 그리며 파고 또 판
구덩이
그 안에 너를 향한
눈물이 담기고 담겨
깊은 우물이 되어
너의 미소
비춰지는 그 물에
입 맞추려다
나 그 물에 빠져 죽다
재입사
우리집 시계는
내가 재입사하던 그 날로 멈춰졌다.
서랍위 쌓여가는 펼치지 못한 아이의 미소
구석진 곳 먼지쌓인 다섯시의 여유
계절지난 옷은 서랍에 뒤엉켜 흐르고
작아버린 양말은 주인이 없다
유치원 사진 속 아이의 옷은 낯설고
엉성하게 묶인 머리카락은 슬프다.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도
주소를 몰라 연락처를 몰라 갈 수 없는 우리
주말 몇 번의 외식과
통장에 조금씩 쌓여가는 돈과
옷장의 채워지는 옷들
그걸로 행복을 느끼기엔
잃어야 할 것도 잊어야 할 것도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