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을 걷다
가을 숲 소란스럽다
단 하나의 습기조차 남기지 않은 가랑잎, 단단한 땅을 뚫고 솟아오를 부활을 예비하는 열매들
날아오르는 새들의 몸짓에 마른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
송산리 백제 고분군은
천년의 영광을 꿈꾸는 왕조의 말발굽 소리
새벽 별빛에 깨어나 달빛에 잠들고 싶었던
젊은 도공의 간절했던 기원
연화 무늬 벽돌 한 켜 한 켜에 쌓이던 울음
천년의 꿈속에 웅웅 거리고 있었다
절대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 하루를 잠시 벗어두고
햇빛을 가리지 않고, 바람을 피하지 않고 떠나 온
하루는 고요하 질 않았다
다시 천년이 지나고 난 후
어느 흔적, 어느 작은 소리가 내 오늘을 꿈꾸게 해줄까
늙은 남자
오래전 아주 오래전
봄바람을 뚫고 달려 사막을 찾아 모래성을 쌓았지
허리를 곧추세운 채 시선은 정면을 향하여
성난 고양이 꼬리같이 잘 다려진 바지에
굽이 단단한 구두를 신은 채
두 팔을 힘차게 흔든다
가을 햇빛은 찬란하고
시간은 여유롭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골목은 꽤 길다
한참 지나도 지나는 사람 하나 없고
빈집 문틈으로 바람만 지나고
골목은 한적하기만 하다
술, 담배는 해로워 끊었고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음성 메세지는 1번 문자 메세지는 2번
쓰레기 더미 속 개 한 마리 짖어대고
그는 아직도 봄 속에서 모래성을 향해 달려간다
그는 여전한 듯했는데
사소한 것들에 슬퍼졌고
낙엽은 화려했고 바싹하니 말라 바스러지고 있었다
낙타를 보내며
95년식 십삼만 킬로
길 잃은 대상을 태우고 미로 같은 사막을 헤매고 다녔지
외등 물혹을 지니고 오른쪽 다리에 상처를 입어
절룩이고 가는 내 젊기만 했었던 날들을 공유했지
날렵한 검은 갈기 휘날리는 천리마처럼 쌩하니 지나치곤 했던
언뜻 고귀해 보이던 자들 손가락질 개의치 않았어
사막을 횡단하던 내겐 참고 또 참아내는
너의 카키빛 가죽이 좋았어
모래바람을 견디어내는 것은
사막을 건너는 자의 외로운 특권
운수 좋은 날엔
오아시스를 찾아 맑은 샘물 맘껏 들이키고
별빛을 바라보며 잠들곤 했지
나는 낙타의 전생을 알 수 없었어
공작새의 깃털이었는지
초원의 붉은 야생화였는지
전생을 모른다 하여
발굽에 박힌 가시를 모른척하진 않았어
낙타가 주저하지 않을 때 절망보다는
아득한 슬픔을 느꼈지
적어도 나는 너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외면하지 않으려 했어
뜨겁게 불타오르는 태양 아래
사막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을 때를 잊지 않았어
끝내 마른 가시나무에 불을 지펴
너를 보낼 수밖에 없을 때 불어오는 서풍에 기도했지
너의 환생을 위해
영등포
한 때는 붉은 해당화,
거룻배 타던 등판 널찍하던 사내들 지천이었다는
떠돌던 말들까지 샛강으로 아득하게 멀어지고 난 뒤
덜컹대는 안갯속으로 야윈 웃음 짓는 소녀들이 모여들고
소녀들 따라 붉은 등 별빛을 발했었다
암초에 좌초한 사내들이 역전에서 표류했고
뒷골목 좌판에 걸린 커다란 솥 안에 남루한 하루가
펄펄 끊어댈 때 우리는 밥 대신 술을 마셔댔다
어느 이국 소공녀의 이름이 높게 매달리고 난 뒤로
삐걱거리던 나무 계단들은 허물어지고
기름때 묻은 손가락들 더 이상 펴지지 않게 되었다
꽃들조차 피어나지 않은 봄이 지나갈 때
모퉁이마다 깨어나지 못할 꿈속에 별들이 내려앉는다
여기는 물을 잃은 포구
꽃을 잃은 달의 뒤편
한 때 흐리고 비
견고한 자음의 틈으로
파고드는 모음의 가쁜 숨결들
거부할 수 없는 규정과 수칙들
나는 허울 허울대는 협력사 비정규직
전광판 숫자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할 때
정확하고 신속해야만 한다
나는 시지프의 톱니바퀴
독실한 신자처럼 주일 아침마다
화려한 비상을 빌어보고 또 빌어보지만
매월 이십일 받아 드는 명세서는
평일 한낮 술잔 속에 물비린내로 가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바닥은
오래된 밥알처럼 딱딱하다
여직 풀지 못한 박스 속 흐려지는 꿈과
자주 베이는 선뜻한 현실 사이엔 안개 자욱하다
한 때 흐리고 비가 오겠다고
붉은 입술의 기상 캐스터 속삭인다
오늘은 비가 와도 좋겠다고
흠뻑 젖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