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학 한국인] 제 20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 「작명소」외4편

by 가로수위에지은집 posted Nov 10,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작명소


 거부 할 수 없어서 이름이 불릴 때마다 대답을 했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또 웃어야했지만 당신은 그때마다 아팠다


 이름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 건 이름 때문이라던 당신과 동명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도 통증은 각자의 몫 이었다


 작명소의 이름은 하나같이 철학관으로 끝이 났다 당신의 이름에는 누군가의 세계가, 얼마큼의 대가를 바라고 누웠는지


 장자는 아직도 꿈을 꾸는가


 버스에 앉아 지나치는 간판들을 놓치지 않으려다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는데 모르는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불 꺼진 네온사인 아래 당신이 걸려있다 가끔 힘겹게 깜빡이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 산다더라 불행한 시인들은 마지막까지 제목을 남겨두어야 했다 무제(無題)를 따라서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는 요령을 배운다




 고등어 몸값



 국민생선 고등어가 제 몸값을 불린다 죽어버리자 이렇게 쉽다 잡는 족족 정수리에 장침을 박아 넣는 고등어 마취사의 손놀림이 바쁘다 미처 재우지 못한 고등어들이 파르르 떤다 총기를 잃은 눈동자에 백태가 끼기 시작한다 힘껏 벌린 체 굳어버린 주둥이에 나오지 못한 말들이 미늘처럼 걸려있다


 엄마는 아빠를 고등어, 멸치새끼라고 했어 아빠의 몸값은 자꾸만 떨어진다

 아쿠아리움을 헤엄치는 고등어를 보고 싶어 쫓기는 고등어의 모습은 재밌는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아이들의 박수가 터져 나온다 도망가다 지친 고등어의 단단한 육질을 탐내는 아쿠아리스트 즉석에서 가른 배에서 밑밥을 모아 재활용하는 낚시꾼들의 지혜만큼이나 꽤가 없는 고등어 무리의 성화


 죽지도 않고 파르르 떠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질서를 위장한 등 푸른 생선의 기하학처럼 몸값을 올리기 위한 몸부림 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손맛을 좀 더 느끼려고 낚시줄을 천천히 감았다 흰 배를 뒤집었다가 좌우로 고개를 흔들다가 생사를 가르는 취미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방파제 사이로 서러운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파도가 입을 막았다 갯강구들만이 분주하게 자리를 뜬다




우리 동네 쓰레기 버리는 날



, ,

해진 후부터 저녁9시까지만

우리 집 앞에서

양심을 시험해 볼 수 있다면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에 오른 달걀을 떼어 먹다가

프라이팬은 어떻게 버리는 거지


간이 아픈 엄마는

어디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지 몰라서

외출하지 않기로 했어


쓰레기를 버리는 다섯 가지 방법

친절한 골목길에 쏟아지는

종량제를 훌쩍 넘긴 불안

무관심한 매듭 속에도 빈틈은 없다


노인들의 리어카에 사과를 하고싶어


오랜만의 외출이란

흘리는 것이 더 많은 수거 차량의 뒤를 밟자

경계를 넘나들 수도 있다

웅크린 채 나뒹굴던

창문 없는 고시텔의 출입구


가장자리부터 익어가는 달걀처럼

어둠으로 향하는 골방의 지점들과

퇴화를 거듭할 때





소원을 말해봐



또 하나의 소원을 얘기할 때,

집이 작아지고

창문은 없어지고

입이 줄어 숟가락이 버거울 때


정지 된 것들에게 맞잡은 두 손이

포르르 떨려 침묵을 돋보이게 하듯이

기도하는 자세로


이미 가진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마지막 소원은

램프에 갇힌 지니를 위해 쓰기로 했지만


갖고 싶던 장난감을 차마, 조르지 못한 아이가

가구들의 음각을 들여다보곤 한다

몇 남지 않은 가구의 틈새로

잃어버린 것들은 있었다?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을 때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그해

가구보다 많고, 음각보다 적은

소원을 가진 크리스마스이브에

둘러앉은 우리

숟가락을 원한다

움푹 파헤필 수 있는 질량을 원한다






잘 보이는 곳에 흉터 몇 개 쯤 있었으면 좋겠다

상처를 숨기는데 능숙했지만

누군가 물어봐주지 않을까하고는


혈관들은 모두 넣어둘게

숨겨둔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

나에게도 사인이 생기겠다


침상에 누워 간호사를 기다리며

차가운 바늘이 몸속을 누비는 상상을 해

몰래 복숭아를 눌러보는 엄마 때문에

나는 곧 물러버릴 것처럼


크로키에 적합하지 않은 얼굴이야

구겨진 종이와 날카로운 펜을 준비했다면

흉터 그리는 수고를 덜 수 있을까


혈관이 보이지 않네요

당황한 간호사는 화도 냈다가 미안해했다가

나는 사과를 했다


악역을 맡는다면

연기를 잘 하는 착각이 들곤 해

누구나 화가 많으니까


더운 피가 몇 차례 훑고 지난 자리가 손끝에 닿는다

피가 모자란 엄마는 불쌍하구나



김경래

krkim123@naver.com

010-5107-8218




Articles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