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맞을 자유
고요한 호숫가 곁에서 걸으라고 만들어 논 길,
그 위에서 울어버려도 상관없다.
하늘이 게워낸 이슬들 얻어맞으며
홀로 빈 호숫가 그 거리에서 비 맞을 자유를 추구할 때,
풀잎 아래로 미끄러져버린 이슬 가슴으로 치솟게 될 거다.
적막한 호수로 떨어진 빗방울에 파장 일으키며 떨어져나간 살점들은
하늘로 솟구치며 펼쳐진 사연들과 마주한다.
키가 큰 교목은 구름과 악수 할 수 있고,
별이 된 나는 일찌감치 이슬범벅이 되었다.
정수리 적신 빗방울 선을 따라 흘러내려,
발끝을 탐한다.
수북이 쌓인 눈을 지르밟듯, 소복이 쌓인 암운에 내딛다.
-
묻어난 愛(애)와 情(정), 그리고 모든 슬픔들이여,
씻어내지 못할 아픔과 씻긴 그리움들이여,
흩어진 바람과, 쏟아진 별들이여!
-
내일 밤에는 시원하게 하얀 얼굴 들이밀어 낸 달과 함께
비 맞을 자유를 논하겠다.
잎, 술
오후의 校庭(교정)에 여름을 두고 왔다
홀로 침묵을 흩뜨리며 벤치에 걸터앉아
스미는 바람을 음미한다
쓸리는 나뭇잎 그림자는 몸을 가리기 알맞다
타들어가는 담배와 어설프게 꼰 다리는
턱을 괴기 좋아한다
그린 하늘은 누구의 바람이려나, 익숙한 낯섦이다
(취하지 않았건만 잔이 넘친다)
다리를 교대하며 꼬았다
쌓인 낙엽은 왠지 모르게 포근해 보인다
-
읽히지도 않는 그리스 철학의 주해를
자해하지 않고 독서하기를 배웠다
액자 속 작은 바다
오래된 나무 재질, 그 속에 망상을 채워 넣어 한 폭의 수채화를.
망상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하나의 나무엔 하나의 마음이 있다.
하나의 액자엔 하나의 바다가 있다.
가끔 출렁이는 표면을 소리 없이 응시하곤 한다.
길 잃은 어부들과 갈매기들이 놀러와 쉬는 곳.
의도치 않은 낯선 이들의 노래들로 가득 차,
디딜 곳이 없다.
푸른 바다는 껴안을 줄 안다.
누구보다도 더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끌어안을 줄 안다, 뜨겁게 끌어안을 줄 안다.
사랑할 줄 안다.
뜨거운 태양까지 끌어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푸른 바다를 액자 속에 접어놓고는,
심장 곁에 걸어둔다.
홀로 내민 별을
한참 고통스러울 때
밤하늘을 바라보면
유난히 별이 밝다
나는 오래된 책을 펼칠 때 스미는
바랜 향기를 좋아한다
고교시절 교실을 메운
삭은 나무 재질의 바닥을 좋아한다
시멘트 채 마르기 전에 새긴
발자국에 고인 빗물을 좋아한다
그렇다 할 이유 없이도 이토록 애정이 깊어지는데
내가 너를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서너 번 쓰러지는 것에 개의치 않다
그것이 너라서 헌념한다
만남은 우연이고
헤어짐은 필연일지라도
돌아서고 싶지 않다
가끔 사무치게 노을빛이 슬퍼 보일 때는
그리움 대신 노을의 아름다움을 논할 것이다
홀로 겨울바다를 마주할 때에도
바람을 타는 파도소리에만 기울일 것이다
자욱한 안개 틈에서 영롱한 빛 내뿜는 달을 볼 때는
눈물 대신 외로운 저 별을 달랠 것이다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별 하나만 작게 빛나거든
그대 사랑한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아들에게
물방울 하나는 보잘 것 없이 말라갈 테지만
그 물방울이모여 바다를 이루면
바위 하나 쉽게 부순단다.
나무 한 그루는 외로워 보이지만
그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면
푸른 내음 진한 향기가 온 마을을 덮는단다.
물소 한 마리는 만만해보이지만
그 물소가 모여 떼를 이루면
용맹한 사자도 기가 죽는단다.
너 하나에 나의 마음과 우리의 사랑을 더해준다면
딱딱하게 녹슬어버린 차가운 무지개를
따뜻하게 풀어내어 온 세상을 뒤덮을 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