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눈도 못 뜰 정도로 환한
백화점을 지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지하상가를 지나
도착한 곳은 구제 시장.
케케묵은 옷더미
누군가 여러 번 입다 만 옷.
싫증이 나서, 더러워서, 맞지 않아서
버려진 아이들이 가득한 구제 시장.
내게 맞는 수준에
내게 맞는 옷을 찾기 위해
구릿한 냄새를 참으며
보물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저들끼리도 새 주인을 만나려
이곳에서 구제해달라고 아우성친다.
내 손길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구제 옷들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 또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내 새끼, 내 방울
방울이 있었다.
애지중지 유심히 지켜보고
금지옥엽 행여나 깨질까
내 방울, 나만의 방울.
방울이 사라졌다.
움켜쥔 손바닥을 펴도
방울은 온데간데없고
희미한 소리만이 남아있었다.
방울을 찾아 나섰다.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 달래며
동네방네 찾아 나서니
내 손안의 방울은 어느새 세상같이 커져버렸다.
방울을 억지로 손에 쥐었다.
방울은 이미 두 손도 모자를 만큼 커져서
자꾸만 손에서 미끌미끌 빠져나가
더 이상 손안에 넣어둘 수 없었다.
방울이 떠나갔다.
쥐방울만하던 방울은 이제 내 손안에 없다.
애석한 마음 달래며 움켜쥔 손을 다시 폈다.
옅은 방울소리가 손안에 스며들었다.
무의식
무의식에 너는 존재했다.
평범한 일상 속에 발을 딛다가도
무의식에 잠식한 너는 내 발을 잡는다.
발을 잡는다, 발을 쥐어짠다.
움푹 파인 웅덩이 하나가 나왔다.
나는 웅덩이를 피하려 발을 넓게 뻗었다.
웅덩이가 소용돌이치며 커졌다.
나는 빠졌다.
웅덩이 속에서 나는 길을 하나 개척했다.
파고, 파고, 또 팠다.
그랬더니, 내 발을 잡던 너의 손이 나왔다.
그 손을 마주잡았다.
내 발이 아닌, 내 손을 너에게 쥐어주었다.
너는 조심스레 내 손을 만졌다. 쓰다듬었다.
그리곤 사라졌다.
너는 걱정이자 과거이다.
밤과 새벽의 경계 속에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이 올 리 없었다. 나는 앞으로의 미래가 두렵다. 절대 최악의 미래는 걷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유명한 점쟁이의 말에도 귀를 닫았다. 들리지 않는 척 애써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새어나오는 눈물 없는 흐느낌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속도 미식거리고. 몸에 아무런 힘조차 들지 않은 채 일렁이는 공기들을 바라봤다.
후회한다. 향기로운 말들만 내뱉겠다던 약속이 흐트러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우리 둘의 평화협정을 깨버린 것이다. 그것이 전쟁의 서막일지, 단순한 삐죽임일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지금 후회한다는 것이다. 미안해서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내가 바란 건 진실들로 가득 찬 변명들이 아니었다. 그저 나를 이해해줬으면 했다. 돌아 오는 건 이해하지 못하겠단 너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조차 이해해버려서 내 자신이 역겨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곤하다던 너는 아마 지금쯤 나와 같이 일렁이는 공기들을 바라보고 있진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 이게 내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피아노, 소나타, 모든 것들
나는 희고도 검은 것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눈을 감으면 내 주위에는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노래하자, 함께.
춤을 추자, 모두.
불현 듯 나타난 소나기에
모두 달아나면
감았던 눈은 고독속에 무서워진다.
도망치듯 빠르게,
쫓기는 듯 서둘러.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광기어린 소나타
변해버린 모든 것들.
멈춘 불청객에 눈을 뜨면
늘어진 열손가락
상처어린 반달속
나는 또 다시 페달을 밟는다.
울려퍼져라, 내 모든 것들.
이름 : 오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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