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한국인]제 21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멍들다 외 3편(임재원)

by chiseP posted Dec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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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들다

그저 심상을 어지럽게 늘어뜨려 놓을 뿐인
A4 용지
눈앞의 모니터
소금기 어린 바닥
녹아내리듯 걸어다니니
보는이가 지쳐 내밀었을지 모르는 손마저 시야 밖으로

손은 죽은글을 쓸뿐이라
갈 곳을 잃어버린 잉크는
살 의미를 잃은것이나 마찬가지
넌 무가치해지는구나
마음이 위로의 위로를 거듭하고
온몸에 번저버린 검은색으로
정작 구멍나는 가슴에 억지로 쑤셔박은 사탕
강제적인 죽은 불빛을 내는 네온바다를 헤엄쳐
단물이 머리를 쑤실때쯤 눈보라 치는 저녁 7시

마치 진실이라 우쭐대던 과거가
한때 미래였던 자신이 또다른 과거를 찢어발겼듯
이 머리가 꿈꾸던 미래조차 한때의 과거로
양옆을 스쳐지나갈 앞으로의 표정들처럼
그저 찢어발겨지겠지

견디지 않는것이 좋을것이다
철학을 멈춘 머리가 약을 탐할뿐
머리가 원하기에
가슴이 두근거릴수 있어서
그 쉬운논리를 애써 벗어날 필요가 없다
손에 쥐인것이 약
스마트폰
보고서
가방
눈앞의 시
그저 위로받을뿐인
찢어발긴 대가를 치룬
찢어발겨진 지금의 과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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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露

너무
오래 떠나있었나
내 발을 받치는 이상향이란 이름의 땅에서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어른들은 주변에 가지도 못하지
닳아버린 카메라
이제 넌
저 뒤엉킨 풍경을 씹지도
어떤 미래도 소유할 수 없게 되었나
오랬동안 솎아낸
맑은 사진
저 역사를
오랜시간 홀로 둬버렸다
등을 돌리고 있었지
네 눈을 보지 못해도
그 나뒹구는 가을의 잎사귀를
헤아릴 수 있었을까
시도하지 못한 아픔
하늘은 높기만 했다
닿고자 했던 마음은
이제 지나갈 길목에 뿌려둔 채
나는 너로부터 한없이 멀어지고
이 사이는 토끼굴이 벌어지듯
자라나고 자라나는 원망으로 인해
이 시야를 가로막아버리겠지
한때의 쾌락
종이 위 글자마저
옆에 쌓인 저 먼지덮힌 잡지와
발자국 소리와
피어나는 풍경들을 사그라뜨리는
한때의 미래들과
소통하게 될지도 몰라
오래 떠나있었다
눈앞의 잎사귀가
흔들리지 않는 때가 올것이다
앞에 보이는건 이상향
가로막혔던 섬을 풍경을 해친 저 바람이
동정의 대상이 될 뿐
눈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는걸
잿빛 하늘
접히는 손가락
다 쓴 필름
무(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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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간다
쥐죽은 듯 조용했던 유령도시
바라보기가 끔찍할뿐이다
밤안개를 뚫고 지나갈
어제 저녁의 렌트카
값비싼 차는 아니었을겁니다
돈을 받아 챙기던 당신의 손은
무척이나 가벼웠고
저 멀리 보이는 꽃밭의 나비가
그 날개짓이 다음날 저 아이를 할퀴게 되는것을
모르고 있는 그 태연함처럼
고작 목숨을 의존할 것이 그거라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럴리가 없지요
저 아이는 막스를 따라
찬송가를 부르러 교회를 찾았고
저 꼬맹이는 하이데거를 만나
나치당가를 부르러 갔는걸요
이제 이곳에 어린아이는 없어요
어른은 더더욱 없지요
그저 도심을 찾아다니는 한때의 어른들이
저 아이들처럼 변하고 싶은 마음에
잠시 들러갈뿐이죠
당신의 니체를 부르고 싶었나요?
우리 머리속에 허무를 담고싶었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다
초인은 더더욱 아니다
저 눈앞의 찬송가를 부정하는일조차 두려워한다
서울로 돌아간다
조용한 유령도시는 나의 고향
이곳엔 그 어떤것을 내려놔도
전부 부질없어질 수 있다
멀리서 보이는 꽃밭은 여전히
가벼운 풍경만을 유지할 뿐이다
베를린은 1시간 전 지나쳤고
잘츠부르크를 지나
눈앞을 지나가는 저 삼나무 숲
나도 막스의 덫에 걸리는지도 몰라
보이는것은 자전거를 타며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이 있을 뿐
붙잡아야 할까
이래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스케치에서
한 풍경의 구석을 차지하게 될 뿐이다
너의 아버지는 문학가구나
주변은 온통 잉크냄새
바이칼 호를 지나며 보이는
명예롭고자 했던 짓밟힌 과거들이다
넌 철도를 이용하지 않았구나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구나
한때의 고향을 갈 뿐이다
이제는 너무 높아서
땅과 하늘과
기어감과 날아다님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뿐
전리품도 없다
밟아오던 얼음빙판은
이제 돌무더기가 되고
자동차는 돌려줘야지
가던 도중 라스푸틴을 만났고
이발소에서 받은 파우스트롤 선물했다
너가 거기 타고다니는것은 날아다니는게 아니야
거기서서 멈춰있을 뿐이지
서울로 돌아간다
손에 쥔 노트
지쳐서 바꾼 두 켤레 구두
더 이상 꽃밭은 보이지 않아
하나의 화폭으로 부질없어져서
땅에 내려앉았음이 분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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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tion

모든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을 접고
스스로의 머리로 철학하지 않는 순간은
반드시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타인에 의지하고
시가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멀리서 고향을 찾아온 누군가를 반겨준다는 것은
아직도 나의 손이 쉬지 않고
계속 글을 쓰며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음에도
주변에 많은것이 넘실댑니다
제 주위는 이제 듣고싶지 않은 것들로 넘쳐나서
이 noise를 피하고자 하지만
이 발만큼은 이 땅을 사랑하기에
떠나는것조차 쉽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의 연민을 접는다는 것은
철학하고자 하는 나의 모든것들
손이 철학하고자 했던것이
발이 철학하고자 했던것이
나의 의지에 맞도록 억지로 돌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곳의 밤은 이제 너무나 밝습니다
이젠 하늘의 별조차 빛나기를 포기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조차 보기 힘든지
고개를 숙이고 다닙니다
여전히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기억속에만 남아있던 고목나무는
밤의 도시에서 더 이상 푸르름을 간직하기 어렵습니다
머리는 여전히 철학합니다
Hermann Hesse의 책은 언제나 영감을 줍니다
모든 과오는 돌아오기 마련이라지만
누구나 그 과오를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저 길가의 돌맹이 마저도
바람에 따라 살지 못하고
원망의 대상이 되버리는것입니다
손은 죽지 않습니다
잉크는 마르지 않습니다
시가 영원히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는 없습니다
이 상처는 나의 죄
이 상처는 너의 죄
상처가 갈증을 호소합니다
여전히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아직도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탓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 시를
이 손을
너무 많은것을 부정하고자 했던
그 과오가 다시금 살아나려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시 글을 읽습니다
주변은 여전히 시끄럽고
주변은 여전히 밝습니다
옆의 여인은 아이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앞의 남자는 보조석에서 법구경을 읽고있습니다
이젠 접을때가 되었습니다
손에게 휴가를 주는것은 아닙니다
손가락은 아직도 움직이고자 합니다
당신도 수고가 많습니다
고생은 보답으로 찾아올것입니다
이제는 이 밤을
주변인들의 소음을
신에 대한 찬미를
철학자들의 아우성을
죽이고
죽여서
그 연민이 다시금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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