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짙은 밤이었다.
감은 눈 아래까지 밝아오는 빗소리에
한참을 뒤척이다 창문을 열었다.
생각으로 가득 찬 방 안으로
차가운 빗물이 잔잔하게 들이쳤다.
두 뺨에 닿는 빗물은 따뜻했기에
얼어버린 얼굴은 춥지 않았지만
오히려 젖어버리는 것은 마음이었다.
입술을 뻐끔거려도 언젠가 닿을 줄 알았던 그 속삭임은
하얗고 뿌연 안개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흠뻑 젖어버린 말들이
솜처럼 무거워져 가라앉고 말았다.
바람마저 몰아쳐 빗줄기가 거세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가만히 서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타고
투명한 물방울이 가득 가득 쌓여왔다.
물이 차 올랐다.
어쩔 수 있나, 그렇게 뱅뱅 헤엄만 쳤다.
짙은 밤이 더 짙어지기 전에
잠에 들 수 있었으면.
이상한 나라의
까만 밤을 지새우며
하루하루 생각한다.
이상하다.
아주 커다란 시계를 든 토끼가 살고,
도시를 희뿌연 안개로 물들이는 애벌레가 살고,
병든 카드 병정들이 거리를 지키는
아주 이상한 나라이다.
이상을 꿈꾸기엔 너무나 이상하다.
아해는 무서웠다.
사랑
서로 사랑하며 산다는 것
그건 정말로 어려워 보이지만 어렵지 않은 것
전혀 복잡하지 않은 것
내 앞에선 꺼지는 그대의 담뱃불도
매일 배부르다는 그녀의 말도
수줍게 내미는 그 아이의 종이학도
나는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인 줄 몰랐던 것이
사랑으로 다가오기에
나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실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던가.
무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연필을 놓은 지 오래라
열여덟 내 손은
연필을 쥐는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아니, 글을 쓰는 것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어떤 글자를 담아야 할지.
나는 언제부터 이다지도 무지했던가
그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많은 생각들이 여백이 되어
입 밖으로 토해지지 않음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니, 쓸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가버린
나의 하루들이 까닭이다.
늦은 고백
한참 지나버린 후,
이제야 네게 고백하건데,
그때는 미안하다 그 한마디
너무나 어려웠어.
세상을 다 가진 듯
커다란 너를 품에 담기엔
내 그릇이 너무나 작았기에
라는 비겁한 변명을 해 보지만
맞아, 사실 그 뿐만이 아니었지.
처음 맞이한 사랑이란 마음은
작디작고 나약한 나에겐
한껏 부푼 솜사탕,
햇빛에 하늘거리는 비누방울처럼
아름답고, 위태로웠어.
네가 내게 주는 그 모든 마음을
무책임하게 전부 끌어안으면서도
그 만큼의 마음을 돌려줄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어.
너는 너무나 어여쁜 아이이기에
나와는 달리 거대한 그릇을 품었기에
더 큰 하늘에서 날아다녀야만 했어.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다고 자부했지.
이제야 감히 생각해보지만,
감히 후회 해보건데,
그 때의 너는 아마
내 안의 작은 그릇을 깨고
그 모든 사랑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묵묵히 기다려줬던건지.
열심히 노력했어, 네 기다림에 대답하려고.
사랑을 주는 법도 배웠어, 못 이룬 것들을 일구어나가려고.
이미 너무 늦었기에 얘기하건데,
혼자서야 입을 열어보는데,
사랑했어,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늘 사랑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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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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