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권 / 서울 도봉구 도봉로 121가길 22-1 / 010-9751-2757 / guyfincher@naver.com
1 어머니의 김치
간밤에 뒤척인 이불이 산처럼 떠 있는
겨울 새벽
문득 입안에 감칠맛이 났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알싸하고 청량한
김치의 아삭한 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맛 볼 수 없는 어머니의 김치
기억 속에 있는 장독대 항아리의
뚜껑이 열렸나보다
어디선가 소금 뿌리고 양념하는 소리
하얀 배추에 양념이 듬뿍 묻은
김치 속을 싸는 어머니의 손
허공에라도 입 벌려 보는 맛 뵈기 시간
뭉클하게 달고 매운 맛 하나가
오래도록 입 안에 남았다
2 마지막 인사
오래 된 사람은 오래 된 손으로
오래 된 기억을 가슴에 담고
하얗게 서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더 이상 까맣게 변할 리 없는 가닥을
쓸어 빗는 건 너무나 슬픈 춤처럼
한 겨울 찬 서리에 한 올 빠질 때 마다
한 가닥 춤사위가 숨이 찬 까닭
해묵은 말들을 털어내지 못하고 젖은 몸
돌아오지 않을 땅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는 맨발이었다
3 탁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4개의 다리 관절이 삐걱거린다
살 밖으로 삐져나와 겨우 숨을 트는
녹슨 숨소리
발목은 버겁게 휘청거렸다
삐그덕 기침소리에 묻어난 쇳가루에
목이 긁힌다
연신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백열등
굳이 졸리지 않아도 눈이 감기는 축축한 유리창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내는, 이미
술 한 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궁시렁 갉아먹은 푸념의 부스러기가
등허리를 기어가는 구멍가게
칼바람 부는 문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결단코 겨울이 아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살들이 뼈를 떠나 바람 속을 달아났다
탁자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4 거울 앞에서
자꾸만 등의 한 곳이 가려워
거울에 비춰보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오래 된 기억 하나 웅크려있었다
긁어내지 못했다
손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분간할 수 없는 기억의 정체
뻗었던 손끝으로 흐르는
암호 같은 기억의 전류
돌이킬 수 없이
5 손등을 긁으며
책을 뜯어먹는 동안
모기 한 마리가 피를 빨았나보다
어디가 물린지도 모르게 가려워
손톱의 날을 세울 때
목으로 넘어간 활자들이
위장의 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살갗으로 굵게 지나간 손톱자국만큼
속이 쓰렸고 아무리 긁어도
채워지지 않는 손가락의 허기
손가락 끝에 묻은 글씨의 잔액들을
핥아보았다
눅눅한 단내가 났다
홀연히 사라진 모기 한 마리
찾아 낼 이유도 없이
죽은 나무 끝에서 피어난
빨간 꽃 냄새
박병권 / 서울 도봉구 도봉로 121가길 22-1 / 010 9751-2757 / guyfinch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