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차 창작 콘테스트 시 공모, 독박 외 4편

by 파반느 posted Jan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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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박(운수 좋은 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시간의 언저리
하루를 되돌아보지만 한숨만이 침전했고
단출한 방 안에선 사람 냄새가 사라지고 있었다

"괘씸한 년"

이 여편네가 죽은 건
살아생전 나를 고단케 한 것만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아
겹겹이 쌓인 가난의 지층을
오롯이 나에게만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였으리라

"이, 괘씸한 년"

생떼같이 살아있을 땐 언제고
밥상을 차려주니 이제 제사상까지 차리란다
안간힘을 다해 돈을 벌어왔는데
너는 안간힘을 다해 살지 않았다

어지럽게 흘러가버린 오늘 하루에 반항하듯
나는 이 밤의 끝에 매달려 새벽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어미를 보냈다


아버지가 어미를 보냈다
보낸다는 것을 알았어도
쉽사리 보내지 못하였다

삼 일 동안 두 줄로 지내며
부조금이 무거워지는 만큼
후회와 합리화만 응어리졌다

세상에 온 건 아버진데
떠나간 건 왜 어미인가

아버지는 
오늘 아침 소파 앞에 앉아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나도 고아다 이제




잃어버린 길              

칠흑을 걷는다

여명은 내 횡포를 견지한 듯
아득하게나마 삶을 비춘다

불안이 답습하는
두 갈림길 위
이정표는 사라지고
삶의 후회만 깊게 파였다

영광이 사라진 길엔
습관만이 도사린다

새삼스러웠던 기억이
까마득했다

흔들어 섞어봐도
무지 만 떠올랐다

나는 다름없이
망자처럼 떠돌았다



꿈에

게슴츠레 뜬 눈 사이로
해가 어기적어기적 걸어들어왔다
언제 잠든 지도 모를 나날들의 연속에
슬퍼하다가, 또 슬퍼하다가, 
분노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어진 건
슬퍼할 권한이었을 뿐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콱 깨물어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마저도 못하는 이유는
내 딸이 돌아올까 봐
아니, 
거기서 내 딸을 만날까 봐



잃음


꽃잎이 살랑,
바람에 톡,
단출한 의성어 하나만을 남긴 채
무의식 속에 침전했다

잊기 위한 노력은
잊지 않기 위해 변질되었고
때때로, 수면 위에
달의 뒤 편의 미소가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설동원
ehddnjs21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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