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분 공모] 심해 외 4편

by stationaryphase posted Jan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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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



아득히 까만 이 세상에서

한없이 걸어봤자 길은 없고

죽을힘을 다해 뛰어봤자 하늘은 없고

제자리에 떨어지는 것조차 행운이어라



그렇게 헐떡이다

아득히 까만 이 세상마저도

비틀거리다 무너지면



난 그대로 사라지겠지



소리 없이 지나가겠지





돌아가는 길




무지개가 유난히 선명했던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직 고여 있던 빗물



물웅덩이 하나에 어머니

물웅덩이 하나에 아버지

물웅덩이 하나에 청춘

물웅덩이 하나에 세월



징검다리마냥 밟아 건너

대문 앞에 두 발로 서니

그제야 보이는 젖은 신발



참 먼길을 돌아왔구나





이른 생각




이른 아침 뒤척이다 조용히 눈을 뜨면

싱그러운 햇살이 나를 감싸오는게

아마 두둥실 떠다니는 저 뭉게구름보다도 더

높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창문으로 뛰어가 구름하나 타고서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봐

발아래 펼쳐진 이 세상이

계속해서 날 부르지만


이대로 바람이 되어 버릴까

달이 지구를 다 돌아갈 때쯤에

아무도 모르게 살포시 떠나버릴까



잠시 이른 생각을 해 볼 뿐이야






나의 오랜 벗에게




혹여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에 아무도 없을까 두렵거든

내 마지막 소원도 잊어버린 채 그대를 빌어 하늘에 언질을 넣어 두었으니

그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생각일랑 접어두고 그저 태평스럽게 내 손이나 잡아 주오




착각



새벽을 담은 거리를 거닐다

한껏 술잔을 기울일 때면

그제야 이미 떠버린 해가 비치겠지



선명히도 쏘아대는 빛에

가까스로 눈을 뜨면

하나 둘 네게 했던 약속들이 떠오르겠지



듬성듬성 지켜주지 못한 것들을 뛰어넘어

벌써 도착한 마지막에 넌 내게 그랬지

사랑하긴 했냐고


근데 말이야


어쩌면 널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랑을 너무 믿어서

굳이 사소한 하나까지 챙기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나봐

우리 사랑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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