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아득히 까만 이 세상에서
한없이 걸어봤자 길은 없고
죽을힘을 다해 뛰어봤자 하늘은 없고
제자리에 떨어지는 것조차 행운이어라
그렇게 헐떡이다
아득히 까만 이 세상마저도
비틀거리다 무너지면
난 그대로 사라지겠지
소리 없이 지나가겠지
돌아가는 길
무지개가 유난히 선명했던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직 고여 있던 빗물
물웅덩이 하나에 어머니
물웅덩이 하나에 아버지
물웅덩이 하나에 청춘
물웅덩이 하나에 세월
징검다리마냥 밟아 건너
대문 앞에 두 발로 서니
그제야 보이는 젖은 신발
참 먼길을 돌아왔구나
이른 생각
이른 아침 뒤척이다 조용히 눈을 뜨면
싱그러운 햇살이 나를 감싸오는게
아마 두둥실 떠다니는 저 뭉게구름보다도 더
높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창문으로 뛰어가 구름하나 타고서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봐
발아래 펼쳐진 이 세상이
계속해서 날 부르지만
이대로 바람이 되어 버릴까
달이 지구를 다 돌아갈 때쯤에
아무도 모르게 살포시 떠나버릴까
잠시 이른 생각을 해 볼 뿐이야
나의 오랜 벗에게
혹여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에 아무도 없을까 두렵거든
내 마지막 소원도 잊어버린 채 그대를 빌어 하늘에 언질을 넣어 두었으니
그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생각일랑 접어두고 그저 태평스럽게 내 손이나 잡아 주오
착각
새벽을 담은 거리를 거닐다
한껏 술잔을 기울일 때면
그제야 이미 떠버린 해가 비치겠지
선명히도 쏘아대는 빛에
가까스로 눈을 뜨면
하나 둘 네게 했던 약속들이 떠오르겠지
듬성듬성 지켜주지 못한 것들을 뛰어넘어
벌써 도착한 마지막에 넌 내게 그랬지
사랑하긴 했냐고
근데 말이야
어쩌면 널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랑을 너무 믿어서
굳이 사소한 하나까지 챙기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나봐
우리 사랑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