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커피>

by 김기성 posted Jan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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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을 앞둔 절망적인 시간

더 이상 발버둥치기를 포기한, 아니

거부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공간.

철장 너머 이 차가운 콘크리트 안이

내 스스로가 판단한 마지막으로 이성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벼랑 끝 한 발 앞.

이제 조금 있으면 감정이 울부짖을

이미 지쳐 잠재워둔 감정이 폭발할 철장 밖.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냐는,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준 변호사의 질문

블랙커피 한잔만 마실 수 있을 까요?”라는

부탁으로 지워버리는 내 마지막 유언.

철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공유하는 시선에

이미 많은 말들이 오고가고 있다.

고마움, 절망, 두려운,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원망을 담은 내 두 눈, 하지만 고마웠다.

모두가 등을 내게 보일 때 유일하게

가슴을, 그리고 두 눈을 내게 보여준 이사람.

눈물을 머금은 채 내 두 눈을 바라보다 끝내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선. 가느다란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처음보이는 약한 모습에

터져버릴 뻔 한 겨우 쌓아 놓은 감정의 둑

때마침 간수의 손에 들려온 블랙커피 한 잔.

커피를 받아들고 시선이 고정된 커피 잔 속.

까만 액체가 나와 그의 심경을 대신해주는 순간.

 

알맞은 때와 장소에 있다가 거머쥐는 행운.

때로는 돈을, 때로는 사랑을 쟁취하는 우연.

우연, 복잡한 원인과 결과를 간단하게 만들어버리는

신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는 단어, 우연.

안 좋은 때와 장소에 우연히 있다가 덮어쓴 불행.

호의를 베풀려다 뒤집어 쓴 용서받지 못할 죄.

모든 정황이 우연찮게도 나를 가리켰던 상황

수도 없이 되물은 질문, “도대체 왜? ?”

그러나 아무리 울부짖어도 나를 보든 똑같은 시선,

용서받지 못할 죄인. 그때 유일하게 내 말을

믿어줬던 내 눈앞에 나타난 이사람. 이런

인연도 우연이라면 우연. 내 두 눈의 울부짖음을

다시 온전히 받아주기 위해 떨군

시선을 붙들고 내 눈을 응시한다.

다시 시작되는 말없이 오가는 수많은

얘기들, 그러다 이번엔 내가 시선을 내린다.

 

칠흑같이 검음, 그럼에도 약간의 검붉음이

남아있는 커피.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

스테인리스 컵 손잡이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

한 입 불자 사방으로 퍼지는 향기

입술을 살짝 대고 온도가 알맞기에 한 모금

입에 머물고 향을 느낀다. 마지막 커피치고는

입안에 맴도는 맛과 향이 조금

부족하지만, 다시 한 모금 입에 물고 이번에는

목으로 넘어가는, 그리고 식도를 따라

위장을 거쳐 온몸으로 퍼지는 온기,

차갑게 굳어있는 몸에 도는 생기.

 

그러자 역설적이게도 녹아버리는 감정.

그에 따라 요란히도 용동치는 컵 속 커피

살고 싶다.’ 겉으로 울부짖을지언정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리

억울함을 토로해도 들어주는 사람은 내 눈 앞

이 사람 밖에 없다고 체념한 지

이미 오래전, 왼손으로 커피를 든 손을 꽉

감싸 안아 떨림을 진정시키려 한다.

하지만 곱절로 요동치는 커피.

아무리 체념한 척 해도 결국엔 드러났다.

불안함이, 살고 싶은 마음이, 억울함이

위 아래로 하염없이 요동치는 커피를 통해.

양손으로 붙들고 다시금 넘기는 한 모금,

그러곤 코와 입으로 동시에 들이쉬는 숨을 통해

얼굴 전체에 향긋이 퍼지는 커피 향. 또 한 모금,

또 한 모금, 그러다 드러난 바닥.

커피가 살짝 남아있는 차가운 스테인리스가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온기가 있는 커피가 막

사라진 커피 잔은 방안의 냉기를 담는다.

 

바닥난 커피 잔처럼 비워버린 미련

차가워진 스테인리스 잔처럼 식어버림 감정.

내가 내어난 것도, 내가 죽는 것도 모두다 우연.

더 이상 요동칠 감정도 없는 이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절정.

아직 시간이 남아있지만,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중하게 부탁한다.

지금, 바로 지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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