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 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그 밤> 외 3편 - 송예지

by 송예지 posted Jan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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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해가 검붉게 빛을 산란한다.

지금은 여명일까, 아니면 머지않은 황혼일까.

여기는 103호실, 먼지까지도 새하얗게 질린

병실 침대 위.

 

딱. 딱. 딱. 딱, 딱.

몇 십 년은 늙어버린 통나무의 이빨들이 부딪히는 소리.

영혼 없이 뱉어내는 죽음의 잔기침.

차라리 시들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다시는 피어나지 않기를.

 

오늘도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무신경한 당신과 만나고

덩굴이 돋아난 침대에 사정없이 묶여

새끼손톱의 초승달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밤.

 

별들이 무성히 쏟아져 우거져 내린 그날 밤,

사정없이 머리칼을 검은 나무들에 얽어매며 나는 달렸다.

당신에게 나의 체취를 온 몸으로 들키면서.

우우우우, 울부짖는 그림자에 쫓겼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그 전염병 같은 말들에

다시, 온 몸이 곤두선다.

뜨거운 것이 눈주름에 울컥 울컥 차오른다.

이것은 분명 미처 쏟아내지 못한 말들.

 

먼지를 들이마시며 옛 노래를 산란한다.

눈동자로 빛 한 줄기가 따갑게 쏘아댄다.

눈을 더 부릅뜬다.

딱, 딱, 딱, 딱딱...

일정한 소리, 일정한 박자, 일정한 호흡.

핏줄이 곤두선다.

당신은 오지 않는다.




서쪽

    

 

새벽 5시 47분 36초,

홀로 새까만 공기 속에서

남은 날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접고 있자면

아, 어느 새 세상이 뒤집혀 보입니다.

 

귓구멍에 틀어막은 이어폰의 관을 타고 흐르는 가사는

미끄럼틀 타듯 거꾸로 뒤집히고

머리는 발끝에 붙어버린 듯

동그랗게 말린 채로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새벽을 지나 밤을 타고 낮으로 돌아가

길에서 마주친 아이를 생각해냅니다.

그 투명하고 의심 없는 눈빛을 마주합니다.

헛구역질이 다시 치밀어 오릅니다.

 

아마도 만물은 태초에 저렇게

더럽지 않은 티 없이 맑은 눈망울을 품고

세차게 울었을 테지요.

저렇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순수함을 가졌겠지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뒤집혀도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가장 맑은 사람이 되어서

밤까지도 살아있고 싶었습니다.

 

날들이 나날이 무거워져 갑니다.

눈의 생기는 이미 예전에 와르르 무너지고

저는 천천히 끝없는 밤으로 잠식되어갑니다.

이 타락과 같은 길의 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어두운 사람이었을까요.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찾던 티 없는 순수함은 어디로 갔습니까.

밤의 빛을 찾아 헤매던 마냥 작았던 순간은 언제 이렇게 얼룩졌나요.

언제부터 이렇게 무표정한 사람이었을까요.

 

어머니, 서쪽에서 해가 뜹니다.

또 다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현기증이 가볍게 이는 머리를 붙잡고 이불을 젖힙니다.

여전히, 제 방의 형광등은 캄캄하게 먹물을 흩뿌립니다.




남겨진 것들

      

 

종아리를 미지근한 손바닥으로,

손끝 질리도록 주물러본다

 

하루의 고단함이 바닥을 흥건히 적셔 가는데

그대로 몸을 맡긴 나는 묵묵히 젖는다

 

경멸을 담은 어머니의 눈빛을

소파에 남은 인생을 맡긴 아버지를

눈꺼풀로 두껍게 덮어버리고 만다

 

동태눈을 시퍼렇게 하고 손을 더럽혔던 하루,

갈색으로 바란 옛 시절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이

눈앞에서 힘없이 흔들린다

 

왜 청춘은 늘 침체되고

저물어만 가는 것인지

저 핏덩이 같은 해는 다시 뜰 텐데

 

귀에 들리는 라디오 882번 주파수

차… 막히는‥ 운전, 가족‥ 조심…

띄엄띄엄 이계의 언어가 귀에 흘러들어온다

 

붉은 사이렌 소리는 눈치 없이 귓가를 서성이고

다 쪼그라든 담배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오십 중년의 힘없는 맥아리

 

어느 것 하나 건강하지 못한 이 집에서

마트의 반값세일 고깃덩어리만 형형색색,

싱싱한 채로 죽어있다

 

정육점 아저씨의 건조한 외침이 화살처럼 날아든다

마지막 남은 고기가 반값 세일!

 

결국, 남겨진 것들의

우스운

마지막 체면






새벽

      

어스름한 창문에 기대어 초점 없이 창밖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썩은 내 풍기는 동태 눈동자들이.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기에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

빨간빛 실타래가 뿌옇게 번지며 살결을 더듬는다.

귀 밑 짧은 단발머리는 뒤엉켜 뭉개지고

무심한 허공과 눈을 맞추다 힘없이 손끝을 휙, 떨군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창백한 바닥에는

산산이 찢겨져 볼품없이 굴러다니는

누군가의 가식 섞인 마음이,

그 뻔하고도 진부한 못 같은 말들이

사정없이 바닥을 헤집고 파고들며

소름 돋는 웃음을 크게 터트리고 있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더럽게 기분 나쁜 눅눅함, 그 끈적끈적함.

떨궈진 손끝에는 힘없이 식어있는 하루살이 한 마리.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계 바늘 끝의 칼날은 사정없이 세상을 벤다.

무한한 시간 속에 나는 그저 톱니바퀴 부품으로,

끝없이 자꾸만 같은 길을 돌고, 돌고, 돈다.

 

세상을 마주하며 검붉은 피를 울컥대고

너덜너덜한 밴드로 애써 상처를 꿰매며

벌레 꼬인 더러운 흙탕물을 마시는 게

이 세상의 희망찬 청춘이라는데.

 

희끄무레한 형광등이 조금씩 컴컴한 먹물을 뿜어낸다.

마지막으로 마주한 새벽은 어김없이 선혈 속에서 태어나려는데

저 멀리 어딘가에서 닭이 하염없이 울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똑같은 자물쇠를 걸고 사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무엇을 일깨우겠다고.

 

이제 곧 여명이다.

황혼 같은 여명이 죽음처럼 다시 피어오른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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