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그대는 초여름
하얀 웃옷이
조용히 팔랑팔랑
그 대문 앞에서
소나기 맞다 들어서면
내 젖은 머리를 빗어주었죠
그 때 해가 떴고
하얀 삼베 이불은 반짝반짝
또 팔랑팔랑
<여름 사과>
드디어!
여름 풋사과를
하얀 담 너머로
던져주었군요
못난 나도 담 너머에서
못내 미안했는데
이제는
초록 모기장 안에서 잠든
그대에게
커다란 하얀 부채로
그대 꿈 속에
바람을 보내줄게요
<솜구름>
텅 빈 하늘에
구름이 날아간다
반가웠는데
어라
옥상에 널어놓은 솜이불에서
몰래몰래
<눈을 감고>
눈을 감고 떠올려라
어둠과
비명과
산산히 부서지는 두개골
모자(母子)의 생이별
사람인지 아닌지 왜 묻는가
우리의 비명은 같다
<너의 증거>
너의 향기는
이 넓은 공허의
암석들 사이에 잠시 머물렀던
너의 흔적
너무 옅게 남은
그러나
내 가슴에는 가장 짙게 남아
깊게 베어버린
<내일 만나다>
내일 만나요
설레이는 밤
거짓말 같은 아침
내일 또 만나요
거짓말 같은 밤
설레이는 아침
<야만의 시대>
야만의 시대에
가객은 입술을 베이고
화가는 눈을 찔리며
시인의 심장은 뽑히곤 한다
농부는 족쇄를 차고
선생은 수갑을 차며
걸인의 바가지가 박살난다
나는
키 작은 나무에 지어놓은
애처로이 식어가는 둥지에서
누군가를 껴안고
함께 웁니다
<우울한 시집>
우울한 시집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별달리 줄 게 없었고
너는 너무나 미인이었다
내가 가진
미약한 푸른색만이
파란 장미처럼
만에 하나
당신을 붙들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詩를 훔쳐서라도
<향기>
지난 사랑엔,
한 번 제대로 껴안아 본 적도 없던 그녀의 향기,
진한 샴푸냄새와 능청맞게 뒤섞인 채취를
나는 용케 기억하고서
느닷없는 거리에서
10초나 넘게(시적 표현으로는 냉남하게 들리겠지만, 눈을 감고 한 번 세어보라, 그 시간은 무척 길다!)
해매이는 일도 있었다
나는 아직 당신의 향기를 모른다
그러나
눈빛만으로 날 빼앗은,
그리하여 향기마저 드러내고 만다면,
당신은 곧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버리는 것은 아닐런지
<그대 때문에>
그대 때문에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 황홀하다
그대 때문에
또 언제 비참해질지 모르는 행복감이 짜릿하다
그대 때문에
어쩌면 혼자 해매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기쁘다
그대여 오직
내가 그대를 사랑할 수만 있도록
저 내리막길 아래 휘청이는
나를 내버려두어라
<산책>
나는
쫓기듯
먹고, 걷는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어왔다
그러나 오늘
나는 쫓기는 것이 아니라
쫓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물음이 들었다
무엇을?
예술가 흉내를 내며
일확천금을?
그녀를 생각하거나
산책을 할 때면
시상이 마구 떠오르곤 하는데
그녀와 함께
한두 시간 정도 걷는다면
어줍잖은 시집 한 권 정도는
순식간에 써낼 수 있을 터이다
오랜만에 간
옛동네에는
주인이 바뀐 단골 슈퍼와
바뀐 자리를 알지 못한 우편물들,
성벽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물로 둘러싸인
재개발구역 같은 것들이
나를 서성이게 하였다
묘하게도 옷집에는 불이 나 있었고
지나가는 어린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으며
"나 보러 갈래" 하였다
그 웃음을 참고 집으로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위중하시다, 는
참으로 대비되는 소식
시상은 금새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지저분한만큼 진지한 사랑의 시>
내 내장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사랑
네 얼굴의 모낭충마저
훑어먹고 싶다, 훑어먹을 수 있다
너의 그다지 고약하지 않은 방귀를
네 폐 깊숙히 들이쉬어
귀여워해주고 싶다, 귀여워해줄 수 있다
그 도시의 새벽(기억해?),
이름 모를 쓰레기통에게서 애정을 느꼈듯이,
네 모든 구석구석,
너의 겨드랑이!
너의 오금!
그 모든 곳을 훑고 싶다
보나마나 나는
담배연기로 인해
너의 폐에서부터 풍겨오는
구취를
허브티를 마시듯이
반가이 들이킬 수 있을 것이다
<돌고래>
내가 어릴 적부터 좋아해온 색은
파랑 그리고 연파랑
파란 바다와 하얀 파도 거품의 줄무늬
그리고 거울 같이 비치는 햇빛 위에서 춤추는
돌고래를 본 적은 아직 없지만
그만큼 널 사랑해
<우리동네 동물들>
개가 죽은 것일까
어느 집 앞의 낡은 개집
그리고 올라오는 계단에서
잘린 꼬리의 고양이
야! 고양아(끝이 마냥 언젠가 불이 붙었는지 까맸다)
너 꼬리가 왜 그러냐
그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 가버렸다
아래 어디선가는 또
흰 개 두 마리가
짖으며 싸우고 있다
나의 만류를 듣지 않으며
나는 내던진 담배꽁초의 불이 꺼질 때까지
찬바람을 마시다가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