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회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초여름 외 14편>

by 규성 posted Jan 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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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


 그대는 초여름

 하얀 웃옷이

 조용히 팔랑팔랑


 그 대문 앞에서

 소나기 맞다 들어서면

 내 젖은 머리를 빗어주었죠


 그 때 해가 떴고

 하얀 삼베 이불은 반짝반짝

 또 팔랑팔랑



 <여름 사과>


 드디어!

 여름 풋사과를

 하얀 담 너머로 

 던져주었군요


 못난 나도 담 너머에서

 못내 미안했는데


 이제는

 초록 모기장 안에서 잠든

 그대에게

 커다란 하얀 부채로

 그대 꿈 속에

 바람을 보내줄게요



 <솜구름>


 텅 빈 하늘에

 구름이 날아간다

 반가웠는데


 어라

 옥상에 널어놓은 솜이불에서

 몰래몰래



 <눈을 감고>


 눈을 감고 떠올려라


 어둠과

 비명과

 산산히 부서지는 두개골

 모자()의 생이별


 사람인지 아닌지 왜 묻는가

 우리의 비명은 같다



 <너의 증거>


 너의 향기는

 이 넓은 공허의

 암석들 사이에 잠시 머물렀던

 너의 흔적


 너무 옅게 남은

 그러나

 내 가슴에는 가장 짙게 남아

 깊게 베어버린



 <내일 만나다>


 내일 만나요

 설레이는 밤

 거짓말 같은 아침


 내일 또 만나요

 거짓말 같은 밤

 설레이는 아침



 <야만의 시대>


 야만의 시대에

 가객은 입술을 베이고

 화가는 눈을 찔리며

 시인의 심장은 뽑히곤 한다


 농부는 족쇄를 차고

 선생은 수갑을 차며

 걸인의 바가지가 박살난다


 나는

 키 작은 나무에 지어놓은

 애처로이 식어가는 둥지에서

 누군가를 껴안고

 함께 웁니다



 <우울한 시집>


 우울한 시집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별달리 줄 게 없었고

 너는 너무나 미인이었다


 내가 가진

 미약한 푸른색만이

 파란 장미처럼

 만에 하나

 당신을 붙들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를 훔쳐서라도



 <향기>


 지난 사랑엔,

 한 번 제대로 껴안아 본 적도 없던 그녀의 향기,

 진한 샴푸냄새와 능청맞게 뒤섞인 채취를

 나는 용케 기억하고서

 느닷없는 거리에서

 10초나 넘게(시적 표현으로는 냉남하게 들리겠지만, 눈을 감고 한 번 세어보라, 그 시간은 무척 길다!)

 해매이는 일도 있었다


 나는 아직 당신의 향기를 모른다

 그러나

 눈빛만으로 날 빼앗은,

 그리하여 향기마저 드러내고 만다면,

 당신은 곧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버리는 것은 아닐런지



 <그대 때문에>


 그대 때문에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 황홀하다

 그대 때문에

 또 언제 비참해질지 모르는 행복감이 짜릿하다

 그대 때문에

 어쩌면 혼자 해매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기쁘다

 그대여 오직

 내가 그대를 사랑할 수만 있도록

 저 내리막길 아래 휘청이는

 나를 내버려두어라



 <산책>


 나는

 쫓기듯

 먹고, 걷는다는 말을

 참 많이도 들어왔다

 그러나 오늘

 나는 쫓기는 것이 아니라

 쫓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물음이 들었다

 무엇을?

 예술가 흉내를 내며

 일확천금을?


 그녀를 생각하거나

 산책을 할 때면

 시상이 마구 떠오르곤 하는데

 그녀와 함께

 한두 시간 정도 걷는다면

 어줍잖은 시집 한 권 정도는

 순식간에 써낼 수 있을 터이다


 오랜만에 간

 옛동네에는

 주인이 바뀐 단골 슈퍼와

 바뀐 자리를 알지 못한 우편물들,

 성벽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물로 둘러싸인

 재개발구역 같은 것들이

 나를 서성이게 하였다

 묘하게도 옷집에는 불이 나 있었고

 지나가는 어린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으며

 "나 보러 갈래" 하였다

 그 웃음을 참고 집으로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위중하시다, 는

 참으로 대비되는 소식

 시상은 금새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지저분한만큼 진지한 사랑의 시>


 내 내장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사랑

 네 얼굴의 모낭충마저

 훑어먹고 싶다, 훑어먹을 수 있다

 너의 그다지 고약하지 않은 방귀를

 네 폐 깊숙히 들이쉬어

 귀여워해주고 싶다, 귀여워해줄 수 있다


 그 도시의 새벽(기억해?),

 이름 모를 쓰레기통에게서 애정을 느꼈듯이, 

 네 모든 구석구석,

 너의 겨드랑이!

 너의 오금!

 그 모든 곳을 훑고 싶다

 보나마나 나는

 담배연기로 인해

 너의 폐에서부터 풍겨오는 

 구취를

 허브티를 마시듯이

 반가이 들이킬 수 있을 것이다



 <돌고래>

 

내가 어릴 적부터 좋아해온 색은

파랑 그리고 연파랑

 

파란 바다와 하얀 파도 거품의 줄무늬

그리고 거울 같이 비치는 햇빛 위에서 춤추는

돌고래를 본 적은 아직 없지만

그만큼 널 사랑해



 <우리동네 동물들>


 개가 죽은 것일까

 어느 집 앞의 낡은 개집

 

 그리고 올라오는 계단에서

 잘린 꼬리의 고양이

 야! 고양아(끝이 마냥 언젠가 불이 붙었는지 까맸다)

 너 꼬리가 왜 그러냐

 그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서 가버렸다

 

 아래 어디선가는 또

 흰 개 두 마리가

 짖으며 싸우고 있다

 나의 만류를 듣지 않으며

 

 나는 내던진 담배꽁초의 불이 꺼질 때까지

 찬바람을 마시다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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