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수막
전신주에 걸려있는 집이 있다
가로수 기둥에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는 집이 있다
창문도 달지 않은 채 현관문 활짝 열어놓고
하루 종일 펄럭이는
네모난 집
넓은 방, 주차 공간 확보, 최고급 싱크대,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전신주에 걸려 있는 저 앙상한 집을
저울에 올려놓고 한 참을 계산해 봐도
눈금이 안 보인다
그 옆 플라타너스 가지에서
더부살이 하는 까치집도
가만히 저울대에 올려본다
볕 잘 들고, 수돗물은 잘 나오는지
전철역과 병원은 몇 분 거리에 있고
집값은 떨어지지 않을 것인지,
아무리 손꼽아 봐도 어지럽고 복잡하다
사방이 세멘 벽인 우리 집과
지붕도 창문도 생략한 저 까치집은,
목이 아프게 소리 질러도 누구 한사람
시비한 적 없고,
서로의 허물 눈감아주면서 잘도 사는데
전신주에 걸려 있는 최신식 고급 주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구청 공무원들이
몰려와 철거해 버리곤 한다
시계와 몸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내 손목시계는 몸의 속도보다 몇 걸음
빠르기도 하고 한 나절은 족히 늦장 부리기도 한다
이따금 정시 보다 어긋나기도 하는데,
오늘아침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것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첫사랑 그녀가 아니라
보험설계사이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 몸의 시계바늘은 골목의 치킨집 앞을
지나면서 딴청을 부리거나 주책없이
잠이 들기도 한다
하물며 자장면을 주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려는 참에 배달통이 현관문을 두드려서
당황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방금 본 영화는
극장을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중간 즈음에서
주인공 하정우가 스크린광고에서 재방영되고,
내 몸에 맞춰놓은 알람은 불현 듯 울음보를
터트리기도 한다
머지않아 내 손목시계는 어느 낯선 길을
어둑어둑 따라가다가 나를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
바로 내 삶의 방식이 좌전을 하다가
우회전을 하기도 하고, 바닥을 치고 날아올랐다가
곤두박질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짜 내 몸의 시계 바늘은 방향이 묘연하고
그 행방을 모른다
갯벌일기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갯벌을 펼쳐들고 일기를 쓴다
그 일기장에서 뒷산 별똥별이 해풍에 쓰러지면
먼 겨울 기러기 울음도 들리고
나는 물때를 알고
그대로 검푸른 문장이 된다
이따금 어린 날의 일기를 펼치면
어느 별이 켜 놓은 흰 물결소리에
전설의 갯마을이 철썩철썩 물살치고
썰물에 밀려간 얼굴들이 콜라주를 만든다
어린 날 그림일기에 접어둔 저녁의 갯벌에서
달에게 가만히 말 걸어보면
먼 바다가 켜주는 검푸른 노래들
붉은 수평선에 뉘엿뉘엿 떠오르는 얼굴들이
갸름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어쩌다 또렷한 형상이 되었다가
썰물에 밀려 나간다
이제 검푸른 맨살 드러내던 갯벌에서
소라를 줍던 얼굴들,
물살에 뒤척이는 수초들의 울음
해풍에 쓰러지는 별똥별이 안 보이고
이따금 어머니 목소리에 썰물로 들려오는
갯벌냄새가 그대로 맑은 문장으로 읽혀진다
이름값
철학관에서 사주를 풀어보고
유명 작명소를 찾아가 홀짝수 퍼즐로 맞춰 봐도
도대체 답이 안 나오는 이름,
긍정적으로 살아보려 해도 촌스럽기만 하고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 운명을 갈아타기에는
싹수가 글렀다고 생각하는데
눈치 없이 꽁무니 붙들고 졸졸 나를 따라다니는
내 이름 누가 불러주면
이따금 떼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영화 주인공들은 이름부터 멋지고
성공한 사람들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데
어디에 내 놓기 부끄러운 내 이름
그래서 목돈 들여서 바꾼 이름,
옥출을 ㅡ 나영으로, 미실을 ㅡ 혜원으로
새로운 내가 되고 싶었다
아니다, 옛날 이름이 더 익숙해,
그냥 살지 뭘 바꾸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새 이름 갈아타고 엉켜 있는 일들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게으른 건 우리 집 강아지도
잘 아는데,
그냥 마음으로만 이름을 바꾸기로 한다
구름담요
구름은 무언가를 끌어당기며
나를 떠 밀치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한다
오늘 아침 구름을 뒤집어보니
어스름이 납작납작 내리는 꿈길이다
벼랑에 서서 사방을 허우적이며
내가 부르던 별자리 같은 이름들
둥글기도 하고 갸름하기도 하고
어쩌다 또렷한 형상이 되었다가
나를 밀치며 달아나던 얼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발버둥뿐이던 어린 날의 산길 모퉁이에서
발그랗게 나를 달아오르게 하던
저녁 구름송이들,
구름의 속살을 뒤집어 털어보면
알록달록 나를 비추던 얼굴들이 안 보이고
그 흔한 별자리 이름들도 온데간데없는데
올올이 풀려나오는 두려움들이
담요에서 구름송이로 피어오른다
그런 날은 담요를 온 몸에 돌돌 두르고
가만히 잠이 들어도 좋다
김 정 기
sil5541@ daum. net
010 - 2809 -- 5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