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편지 외4)

by 현민 posted Feb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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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있잖아
편지지 끄트머리에 
네가 좋다고 한 향수를 뿌렸어
종이 끝에 걸쳐진 익숙한 내 향기가
네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킬까 해서.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게 될거야
같은 길을 가지 말고 다른 길을 가야해
네가 가야할 가시밭길이 있다면
차라리 내가 걷는게 나을테니까.

사는게 힘들고 눈물이 날 때에
내 생각이 떠오를 거야
꾹꾹 눌러쓴 내 마음들이 일어나서
너를 꼭꼭 껴안아줄거야

우리 같이 걸으려 했던 길 위에
서로의 마음을 나눠가진 길 아래서
다시 서로가 되어서 갈라진 길 옆에서
내 발목이 움직일 수 없게 묶어 보냈어



아이어른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어른의 몸을 하고 온 몸을 아이처럼 군다
날카로운 칼날을 입 안에 쑤셔 넣는다
내 사탕을 뺏은 미운이가 다시 밉다

미운말에 다시 미운 말 
미운턱에 미운글자
입을 열면 칼날 조각들이 미운이의 입술에 박힌다

입술 아래로 내 미운심장 아래로
새빨간 피가 흐른다

끔찍한 향에 구역질이 난다

그래도 다시 미운말
미운말  
미운손 
미운눈
미운 얼굴 
미운 목소리

이제는 공기도 밉다
다 큰 어른의 귀와 눈에서 미운말이 흐른다



그림자

네 눈을 바라볼때 겨울이 왔다는 걸 알았어
태양의 빛을 담은 네 눈 안에 하얀 얼굴을 한 내가 하얗게 웃고 있었지

가로등 불빛 아래 희끄무리한 그림자 하나
미처 깍지를 끼지 못한 귀여운 애기 손가락.
코에 닿았다 볼에 닿았다 길을 잃은 눈동자 네개

이제는 겹쳐질 수 없는 그림자 두개
서로의 코트 안에서 죽어버린 두 손
행여 마주치기라도 할까 다른길을 걷는 눈동자 두개

네 눈을 바라볼때 겨울이 끝난 걸 알았어
태양을 등진 네 눈 밖에 슬픈 얼굴을 한 내가
하얗게 웃고 있었지




바램

나는
돌덩이처럼 굳은 네 마음을 
깨뜨리고 들어가겠다.
뼛가루처럼 얇게 바스라진다면
나도 기꺼이 바스라질거야
너와 함께 섞일 수 있다면
추운 바닷가에 뿌려진대도 억울하지 않겠지

나는
기꺼이 새하얀 종이도 될거야
내 몸 위에 새로이 긁혀지는 상처의 이유가 
너일 수 있다면 다시 내 몸을 찢어서라도 함께하려
하겠지

너는
내 몸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살리고 
이성을 가져갔으니
속절없이 바보가 되어버린 나는
야속한 네 됨됨이 조차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끼

내가 죽을때 
네 눈이 멈추는 곳에서
나는 비로소 죽을거야
꽃이 되었다가 눈이 되었다가
미끄러운 이끼도 되겠지

내가 죽고 
네가 살때
산넘고 물건너 
봄에서 겨울의 끝으로 
마지막 바위에 내딛었을때
너는 결국 미끄러지겠지
불쌍한 두 다리가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네가 죽을때
네 눈이 멈추는 곳에서
나는 비로소 다시 태어나겠지
절벽 아래로 깔린 등을 파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거야


phyun1030@naver.com
010-4023-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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