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차 창작콘테스트 시부문 5편입니다.

by SQNB posted Mar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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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김

 

겨우내 하얗게 덮인 산도 그 더운 옷을 벗고

꽃망울이 옴짝이는 봄 향 가득한 밤인데

아직 내 신에는 눈이 쌓여 이리도 시린가

 

밤공기 무겁게 내려앉은 어두운 산책로

내리쬐는 가로등 아래로 초록이 돋아나는데

아직 내 숨에는 얼음이 박혀 이리도 무겁나

 

겨울 밤 네 뺨을 덥히던 내 입김은 갈 곳을 잃어

두 손을 타고 안경에 내려앉아 빛을 가리우고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해 뺨을 나고 나리운다.

 

 

아이가 앉아 책을 읽는다

 

아이가 앉아 책을 읽는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푸르고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랗다

아이가 앉아 책을 읽는다

 

아이가 앉아 그림을 그린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푸르고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랗다

아이가 앉아 그림을 그린다

 

아아 아이야

하늘은 검고 산은 노랗고

사과는 푸르고 바나나는 하얗다

아이는 내게 와 안긴다

 

아이가 앉아 책을 읽는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푸르고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랗다

아이가 이윽고 내가 된다

 


전하

 

그 얼굴 한 번 더 보려

한없이 안으로 움츠려야한다

누구보다 낮게 더 조용히 누워야한다

어느 나라의 왕 누구의 어머니

그 얼굴 한 번 더 보려

나를 죽여야한다

 

그 공 하나 더 보려

끝없이 속으로 삼켜야한다

내가 뱉은 숨이 내 목을 조르지 않도록

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공 하나 더 보려

나를 삼켜야한다

 

이윽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불 꺼진 방에 앉아 한 장 한 장 나를 센다

나의 눈물 나의 한숨 나의 나의…….

 

밤도 긴 잠을 마치고 태양의 시대가 오면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나를 굽히고 나를 삼키며

왕조의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안녕하십니까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깡통에 몸을 싣고

빈 집의 문을 열고 내 방에 몸을 뉩힌다

 

달빛도 구름에 가려 별 하나 보이지 않고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방 커튼을 친다

 

빛 하나 소리 하나 나를 들을 수 없게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쓰고 가시지 않은 술 내음에

나지막이 한마디

 

두 팔로 나를 감싸 얼마 남지 않은 나를 안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숨죽인 채 내뱉는다

 

잊지 않으려는 듯이

 

 

세월

 

매섭게 달리던 겨울바람도 제 걸음을 멈추고

꿈틀꿈틀 세상이 태동하는 봄에

아직 나에겐 얼음이 박혀

계절이 가는 줄 모르고 차갑게 더 차갑게

 

내려앉은 밤공기마저 제 몸을 덥히고

타박타박 시간은 제 길을 가는데

아직 나에겐 눈이 있어

가는 시간 잡지 못하고 차갑게 더 차갑게

 

사월의 개나리 노란 옷 차려입고

찌륵찌륵 풀벌레 소리가 가득 찰 때

왜 너는 어둠에 내려앉아

계절도 모르고 시간도 모르고 가만히 있느냐

 

파도도 울음을 그치고 바다가 내뱉은 철선은

너를 올리려 타버린 재처럼 하얀 소금만 내려앉아

닦아도 닦아도 제 빛을 바란 채

무엇이 너를 그토록 무겁게 밀어냈는지 말이 없다

 

몇 개의 겨울이 지나 다시 또 봄은 오는데

봄을 잊은 바다는 녹이 슨 철선만을 뱉어내고

물음을 삼키우고 내 울음만 남긴 채

고요히 교묘히 제 숨을 지운다




   한규진  010) 2593-8388

2018-03-09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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