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회 창작콘테스트 시부문 응모 - <순서대로>및 5편

by 일동경 posted Apr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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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서대로

 

당신을 두고 마당에 나와 그 밤을 울었습니다

햇살 이슬과 잔디에 맺힐 때 일어나 보면

이른 아침 개미들이 고되지도 않는지, 줄지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저것들이 참으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론가 가는 모습에

그 종착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내가 저리 살고 싶다고

그 뒤거나 옆이거나 어찌되었던 곁에는

바로 어제 제게 개미만큼 그 발걸음 울음조차도 그리운

 

귀엽고 한번쯤 깨물어 보고도 싶은 당신이

저리 사는 내 어깨에 몸을 맞대고

개미들이 잠든 어젯밤 울더라도

그 어젯밤처럼 웃더라도

개미들처럼 알몸으로 끌어안고 행복해 했으면

앞으로도 그랬으면 하고

 

무작정 상상을 나아가다 어느 순간

바로 뒤에서 창문을 열고 눈을 부비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몸의 흙을 털고

당신처럼 눈을 부비고

새 옷을 찾고 아침을 먹으려 일어날 때

개미들은 어느샌가 순서대로 열을 지어 내 어젯밤 근심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2.

 

문득 내가 어리다고 느낀 것은

어머니 손에만 잡혀 살던 내가

어머니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거닐 때였다

 

어느 외계인이 세상을 내려다보다

만약 우리를 본다면

아아. 네가 어른이고 네가 아이구나 할 테지만

 

어머니 직접 따신 보리 차를 태운 종이컵에 입을 가져다 대며

오늘 올라가유 당신을 내려다 보면

아이고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이고 얼르은 가야지 아들.

 

방실방실 웃는 우리 어머니가

왜 그 때는 괜스레

무척이나 젊은 어머니 같던지

 

당신의 등보다 커진 나를 업어 기르며

방실방실 웃었던 나의 어머니가 생각나

왜 그 때만, 나를 주저앉혀 버리려 했는지

 

문득 내가 어리다고 느낀 것은

왜 그 때만

혼자 사는 당신을

좋은 아들과 좋은 손자도 며느리도 있는 좋은 집에 데려오려 하지 않았었을까

 

그 숱한 후회 빈 잔 밑 먼지처럼 손에 쥐고

내 어머니 대신 엄마의 살 냄새 나는 집을 와 눕는다

 

 

 

 

3. 분필과 책상

 

가끔 비가 내리면 찢어진 교복을 꺼내입고

후드티와 우산으로 얼굴을 가려 학교를 간다

 

비 맞는 선생들의 차량들

가끔 우리가 꽁초를 숨기던 가로수들

굽이치다 어느 순간 도착하는 학교의 교문을 지나면

 

저 새끼 또 왔다

저 봐라 이미 늦었다니까

여긴 또 뭣하러 오냐 이젠 그만 오거라

 

나를 탓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매일같던 하루조차

그 긴 학생의 옷을 벗던 그날조차도

코를 박고 깊은 꿈을 꾸기에 여념이 없던 옛날

 

나를 못마땅히 보았을

이제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도, 없어진

몽당분필과 흐릿한 칠판들은

시대에 밀려 나처럼

창고 구석에서 비를 피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이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

제 말귀를 들어줄 수 있을 만큼의

자신이 가르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쓰고 그리며 보여줬던

 

하지만 그 어느 때도 내가 눈 한 번 진심으로 마주치지 않았을

오랜 선생들이

부서지고 문드러져 기괴해진

 

아주 내가 잠깐을 보았을

그 모습이 없음에도

아주 내가 잠깐 보고 지나가는 동안

여전히 내게 무언가를 가르친다 그 때의 내가 너를 몰라 보지 못했었지만

 

 



4. 카메라 앞에 서면

 

어느 배우는

욕도 말도 빠짐없이 잘하면서

 

그 불룩한 렌즈 앞에만 서면 벙어리가 되었다

 

어느 작가는

욕도 말도 빠짐없이 잘하면서

 

손수 완성한 작품만 보면 입을 삐죽이곤 그랬다

 

누가 못났지 잘났지

사람들이 앞에서도 뒤에서도 무어라 할 때면

 

그 배우와 작가는 그리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

자신을 볼 수 있는 카메라에 앉혀놓고

 

웃겨도 보고 울려도 보고

행복도 보여주고 슬픔도 보여주고

카메라가 꺼질 때까지 그리 하게 해 봐라

결국 제 낯에 침 못 튀길 양반들이다

 

자기 자신부터 가지는 두려움을 없애야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들

어느 날에 만나도 항상 또다른 그들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지지도 않고, 하나씩 하나씩 이겨내며 용케 그렇게 말했다

 

 

 

 

 

 

5. 아무르의 호랑이

 

봄철 눈이 내리면

날 보러 와요 어머니

 

이번 겨울 동굴 속에서의 깊은 잠이

내 마지막 흰 서릿잠이 될 것 같으니

 

내가 하룻강아지일 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를 낭떠러지에도 떨어뜨려 보고

나를 성난 곰에도 보여 보고

나를 떠나도 보았던

 

숨가쁘게 나를 키웠던

어머니 그 무척 거세던 송곳니를

 

그처럼 자라 아이도 낳고

아이를 숨가쁘게 키우고 떠나보낸 나를

아무르 그 길고 길어 어디인지 모를 강이 녹으면

 

흐르는 그곳에 마지막 눈이 내릴 즈음

날 보러 와요 어머니

 

 

 






작성자 성명 - 이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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