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회 창작콘테스트 시부문 응모 - <칼날> 외 4편

by 어몽 posted Apr 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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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나의 그녀는 요리를 좋아한다.

신혼의 집을 가꾸던 날

흙빛 상자에 담겨온 칼세트

세자루의 칼은 크기모양이 모두 달랐다.

 

여느 주말 저녁 그녀가 좋아하는 도막을

두두리는 경쾌한 소리

톡톡톡톡톡톡톡톡.

 

나는 내가 그녀의 도막일 줄 알았다.

그녀의 경쾌한 칼질을 위해

아래에서 다 받쳐 흠집조차 티내지 않으리라.

 

텅빈 집 어두어진 저녁을

새로 산 노르딕 조명이 하얀 식탁을 밝히고

벽에 매달린 칼은 조용하다

 

그래,

어제 나는 도막이 아닌 칼날이었다.

세자루의 칼이 나란이 서있는 자리에

그녀의 행복이 걸려있다.

선명한 검붉은 심장 색깔의 행복들.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요리를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톡톡톡톡톡톡톡톡.

칼날이 아닌 도막으로 하는 요리.

 

세자루의 칼이 날아오기 전

그녀는 또다른 흙빛 상자에 도막을

먼저 받았다그리곤 기뻐했다.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라며.




<어느 여유로운 새끼 고양이>

 

1

나른한 주말 오후

어미가 없는 작은 새끼고양이가

굶주린 배를 움크리고 

여유롭게 햇빛을 쬐고 있다.

 

다가가 친해지려 했지만

나의 발걸음은 새끼고양이를 귀찮게 만든다.

재빨리 하수구로 몸을 피하고

나의 시선을 외면하고  다시 여유로워진다.

 

갸날픈 허리는 어쩐지 

나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조금  가까워지고 싶다.

허기짐을 짐짓 고독으로 채우고는

여유로운 새끼 고양이.

 주위엔 검은 그물망이 쳐져 있다.

 

2

더이상 외로움은 없다.

 먹어치워버린 고독이 외로움으로

 먹을  없게 지독한 외로움들이,

고양이가 죽었다.

 

김치찌개의 고기를 떼어주고

우유를 나눠주었던 새끼고양이가,

어미를 잃은 건지 버린 것인지

고독으로 홀로 여유로와

늘 혼자 가냘펐던  고양이가.

따가운 햇살을 피해   아래서 죽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여름의  ,

새끼 고양이를 키우고 싶던 나는

없는 외로움을 짜내 나에게 고독을 준다.

혼자 여유로와 진다.

  


 

<가시돋움>

 

입안에 가시가 돋았다.

힘없는 내게서 나온 가시가 제법 그럴싸하게 찔러대니

마치 내가 세진 것 마냥 신이나 너에게로 뻗어간다.

마치  모습이 너와 닮아서 마냥 너에게로 뻗어간다.

 몰랐을까 가벼움을아픔을.

 

마음 속의 거품은 가라앉지 못해 가벼워지고

기다리던 가시를 만나 입안에서 터져버렸다.

쾌쾌한 곰팡이내가 새어나오더니 이내 독이되었다.

너의  방울들은 어떻게 달랐기에 약이 되었을까.

이내  독은 나를 중독시키고 새로운 거품을 만들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둘의 온도차는 헛것을 만든다.

봄의 꽃은 신기루마냥 아름다웠고 나의 가시는,

나의 가시는  꽃을 보호하고 싶었던 걸까.

허상으로 남은 꽃을 지키려고 그리 찔러댔을까.

아픈 입을 감싸며 입안에 두드러기가 피어난다.

 

수많은 거품들이 터져 마지막 방울이 남을때까지

그렇게 아픈 가시들을 만들어댄다면아픔도 잊고

기억도 잊고기대도 잊고슬픔도 잊고그래 슬픔도 잊고.

허망과 상실은 거품들과 함께 녹아내리고,

그래 그렇게 그렇게 껍질만 남은 .

 

  


<영감>

 

점심을 먹고   나른한 오후 멍한 표정으로 

답답한 도서관 창문 너머의 하늘을 보며 생각하다 

뭔가에 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이며 새로운 발상을 해낸다

 순간 그의 코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의식을 했다 하더라도 의식하려하지 않았으리라

짧은 영감의 순간이 가고 깊은 집중의 시간이 온다

 

그는 펜을 쥐어 잡았다펜을 아주 쎄게 쥐어잡는다

글씨를 쥐어 짜듯이  내려간다한문장도 막힘이 없다

자신의 의식이 사라진다그는 없고 이야기만 있다.

 짧은 순간들을 되살린다순간이 시간을 통해 기록된다

시간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그는 그걸 알고 있다

어느 순간 부터 그는 느낀다 끝에서의 힘을 느낀다

머리에서 쓰는게 아니다가슴도 아니었다

 끝에서 힘을 느낀다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하얀 종이가 검게 물든다 아래는 붉게 물들어 있다

그의 손이 점점  거칠어진다 끝에 감각이 없어진다

머리가 하얘진다그의 손이  심하게 떨린다

그의 눈이 의식을 잃는다초첨을 잃어버렸다 다시 잡는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중력

  순간의 카타르시스

 순간 맞은편의  여자가 보인다

충격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순간 그의 카타르시스는 멈췄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해 버렸다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그리곤 피를 의식한다미세히 아직도 떨리는 손을 움켜쥔다

떨리는 손으로 코를 막고는 밖으로 나간다

 

자신의  순간을 들킨 수치심이 그가  글도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내고는 

다시 들어가 종이와 짐을 싸고 도망치  나온다

눈이 마주친다충격에 그녀는 움직임 조차 없다

그는 자리를 떴고  자리엔  흔적만이 남았다

집에 돌아온 작가는 자신이  글을 본다

피와 섞이고 꾸깃해진 종이에서 몇개의 단어만이 눈에 띈다

허탈함에 주저앉아 버린다.

 

 

 

<폭식>

 

이른 오후

맑게 개지 않은 흐린 날씨

내 나이에 걸맞는 책을 들고

서점에 누워 서빙해오는 문장들을

되새김질 없이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나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

나를 살찌게 한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한 페이지 한 권

다시 꾸역꾸역 허기를 채운다.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결국 이루어질거야.

너만의 길을 찾아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돼.

좋은 생각을 해라.

더 높은 꿈을 꿔라.

뒤처지지 마라. 행동해라.

쉬지말 것. 뛰어.

 

콰르르릉 쿠르르.

서점만 가면 속이 안 좋더라.

변기물 처럼 시원히 내려가는

나의 생각들.

더 나아지기 위해 다시 자리잡고.

역시 서점이 편하다.

바깥세상을 날 가만두지 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