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창작 콘테스트 시부문 응모작 - 5편

by 푸푸린 posted Apr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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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멀리서 보낸 편지

무표정한 얼굴의 우체통은
밤을 새워 쓴 편지를 씹어 삼키지
잘게 부수어진 단어는 죽지도 않고
차갑게 식어만 갔다지
그곳의 우체국은 문이 닫혀 있어
자물쇠를 열어 줄 사람이 없었네
그는 불어나는 수신인의 이름을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팠네
녹 슬은 입구를 툭툭 털고 여전히
누군가 한 통의 편지를 밀어 넣지
반송도 되지 않고 그 자리에 갇힐
그러나 썩지는 않을 종이들을 자꾸만 쌓네
따뜻한 혀로 한 글자 한 글자
굴려가며 녹여주기를 바랐건만
이제 나는 그런 소망을 삼키기로 했다
그곳의 시간은 평생으로도 모자라지만
누군가와 나는 또 어리석은 발걸음을
마른 비만인 우체통 앞에 찍고 돌아선다
모든 길은 언젠가 뒤돌아 서야하나
무표정한 얼굴만이 남아있는 곳을 우리는
왜 다시 찾아가 낯선 이름을 불러보는가


2

기도


침묵도 그의 대답이었다




3
오늘의 티타임

악천후로 7번 착륙에 실패한 비행기에서 내려
제일 먼저 뉴스를 확인했다 아무런 보도도 없었다
초 단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세상에 그정도쯤은
큰 일도 아니라는듯 나는 그게 퍽 섭섭했드랬다

오늘자 신문 1면을 장식한 사건은 항공기 추락사
안전벨트를 꼭 붙잡고 벌벌 떨던 애는 어디로 가고
진한 바탕체는 커피의 맛을 돋우는 과자 정도일 뿐
우물 우물 씹어 먹는 오전이 그렇게나 평화로울 수가 없다

죽는다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니지 누구에게나 흔한 일
그런데 내 이름보다도 짧은 두 글자에 떨며
누구에게나 흔하나 나에게는 흔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그런 비극이 나를 겨냥하였다면 다른이가 대신
갓 내린 맛있는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겠지
그건 나의 것보다도 더 평화로웠을지 몰라

누군가는 말했지 가끔 슬픔이 없는 십오초가 지난다고
지금, 구름의 뒷편으로 새가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꽃잎은 떨어져 다시는 꽃이 될 수 없고
차라리 내게 이목구비가 없으면 변명이 될텐데
세상보다 무심한 얼굴로 그 십오초를 참 잘도 삼켰드랬다
여유로운 티타임 후 빵빵한 배가 더부룩하다


4
몽상가

일년전 너와 내가 아직 같이 있었을 때
느린 달팽이에게 찾아가 일년후의 편지를 전해달라 했지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갈라진 나무 의자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서
남아있던 한장의 종이를 반씩 찢어 글을 썼다
너의 반절의 편지와 나의 반절의 편지는 따로
사각 쪽지가 되어 손그릇에 담겼다
그 손의 주인은 너 아닌 나였기에 너는 웃을 수 있었나
가만히 벌린 검은 입 안으로 쪽지를 밀어넣던 순간
그때 분명 우리 같은 표정을 지은 것으로 기억한다
쪽지는 일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이후 나는 표정을 잃었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하루들이 반복되었다
내가 이사하는 날을 공연히 미루고
이유없이 우체통을 뒤적거릴 수 있는 날도 더는 없다
이것은 마지막 밤
기억이 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반쪽짜리 기억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어쩌면 모두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궁지에 몰고
없는 정신병을 만들고 여전히 너는 가볍게 웃고
이 밤이 지나면 눈을 뜰 수 있을까 맞은편에 있는
너의 미소가 희미하다 그를 따라 나도 사라지고싶다
살짝 올라간 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려온다


5
거울

누군가 내 얼굴의 크레이터를 말해주었지
지루하고 메마르고 깜깜한 곳
가장 낮은 지대에서 살던 토끼는
보이지 않는 벌레에게 잡아먹혔어
벌레는 달의 끝과 끝까지 걸으며
자신의 새끼를 촘촘히 낳았지
지름만큼 늘어난 악취는 무거워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네
화성의 목 수성의 어깨
목성의 가슴 토성의 옆구리를 넘어
쫓아가다보니 배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빅뱅의 흔적까지도 먹어치우려는 이
벌레의 지독한 식욕을 이기고 싶지 않아
이대로 까만 영원이 되는 일도
나는 썩 나쁘지 않다고 말했어 그러자
누군가 저기에 맨몸의 여자가 되어
나를 보며 태양의 눈물을 흘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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