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용소 의사의 기록
여기는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어느 수용소.
공기 좋고 사람 좋은 이곳에
높은 벽을 올리고 철조망을 쳐놓은 수용소.
죄수 번호 20827번은
이곳에 오기 전의 삶을 잊어버렸다.
아무것도 못 보는 탁한 회색빛 눈으로
아무 목적 없이 복도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다.
죄수번호 30506번은
오늘도 30527번과 피 터지게 싸웠다.
취미라고는 아무 의미 없는 숫자 구경인 그들은
허구한 날 서로 얼굴만 보면 그렇게 욕을 뱉는다.
죄수번호 20319번은
오늘도 몰래 이상한 걸 퍼마시다가 실려 왔다.
상처만 나면 무슨 흙탕물 같은 것만 찐득찐득.
그게 또 재밌다고 낄낄대고 있다.
여기는 시내 한가운데 있는 수용소.
나는 이곳으로 매일 출근해 그들을 살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치료하지 못하고
턱뼈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쌉쌀한 아픔을 맛보고 있다.
내 번호는 30406번.
나 또한, 어딘가 썩어가고 있다.
엿이나 드세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주 코믹영화를 찍고 앉았네.
그냥 가만히 좀 있으세요.
움직일수록 우스꽝스러우니까.
요즘 장사가 안 돼 고생이라고
자기 친구를 팔아먹고 앉았네.
그냥 조용히 좀 있으세요.
그 말들이 더 짜증나게 하니까.
아무리 줄 것이 없었다고 해도
개들도 못 받을 걸 주고 앉았네.
제발 웃기지 좀 마요.
안 그래도 입이 쩍 벌어지니까.
알겠으니까 엿 좀 드세요.
당신들 잘 붙으라고 하는 소리니까.
아주 욕이 착착 붙으니까.
레지스탕스의 기도
주여.
오늘도 이 미쳐버린 세계에서 살아남고 말았습니다.
겨우 숨만 붙어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골목의 활기는 총살을 당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이 세상은 죽어있어야 합니까?
오늘은 한 사내를 밀어 버렸습니다.
저를 꺾기 위해 저 어두운 벼랑 아래에서부터
맨손에 피가 나도록 올라온 자를,
실은 적인지 아군인지도 몰랐던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렁텅이 속으로 차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이곳은 지옥이 아닌 겁니까?
주여.
차가운 쇠창살을 겨누는 총구가 흔들리지 않도록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진짜 삶을 되찾도록 도와주소서.
성자 성부 성령의 이름으로
절실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엄 씨네 비닐하우스
엄 씨네 비닐하우스는 오늘도 24시간 환하게 빛난다.
비닐하우스 안 따뜻한 온기 안에서
딸기들은 싱그러운 푸른 이파리를 죽도록 유지한다.
엽록소는 눈 한 번 붙이지 못한 채 광합성 하는 법을 쉬지 않고 암기하고 있으며
줄기는 무당벌레와 친구가 되지 못해 그들을 쫓을 농약을 주문하고
뿌리는 가냘픈 손으로 흙 속의 물들을 사정없이 갉아낸다.
딸기의 하얀 꽃들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리고
그 시체의 흔적도 남지 않은 자리에 핏빛 열매만 맺힌다.
오늘도 엄 씨네 비닐하우스는 24시간 돌아간다.
딸기들도 미쳐 돌아간다.
민들레 씨앗
붉은 벚꽃 떨어져 거름이 되고
백두산 깊은 곳 늙은 야수가
맹렬한 한숨소리를 뱉으며 세월의 가죽을 남길 때
나는 무엇을 남길까.
내 초라한 이름 따위 남겨봤자
후세의 그 누군들 쳐다보지도 않을 텐데
나는 무엇을 남길까.
정말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발버둥만 치다가
나의 한탄을 껴안고 이 흙바닥에 눕는다면
그것이 저 방구석 곰팡이만도 못한 삶이 아닐까?
아니지, 그건 안 된다.
나는 민들레 씨앗을 남기고 싶다.
봄의 수호천사를 남겨 이곳저곳에 승전을 알리다가
으슥한 곳에 누워 썩어가듯이 잠을 자고
샛별같이 노오란 꽃을 피울 씨앗을 남기고 싶다.
그 날을 기다리다가 씨앗을 파먹을 개미만 안 오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