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 - 5편

by 무위자연 posted Apr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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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수평선을 그린 그림을 지나친다

제각각 서 있는 좌표 흔적이 수평선

나는

너와 다른, 그와 다른 수평선

수평선 그림 옆

작가 서명과 해설이 넓은 미술관을 뛰어다닌다


시간을 그린 그림을 만났다

붓질의 흔적을 감추지 않아 시간이 된

휘어진 마른 가지마다 바람이 그려졌고

숲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


서명과 해설은 도망쳤다

붓질의 이동경로를 추적한다

붓이 닿지 않은 그림의 텅빈 곳은 빛의 자리

시의 행간을 읽듯 어둠의 여백을 보다가

무의식과 감각이 뒤엉키고

욕망과 불안, 초조, 환멸이 숲에서 춤을 춘다


그림이 나를 본다

나도 몰랐던 내 정체가 탄로나고

이 순간 이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채로

그림 앞에서 무언가의 직전이 된다






A4용지 위에서 40일



식용으로 사육하는 닭은

40일이면 성장이 끝난다고 하는데

그 닭이 40일 한평생

딛고 사는 평균 바닥 면적은

A4용지 한 장보다 작다는데

닭은 40일 동안 A4용지 위에서

꿈을 꾸며 아득해 했다는데


치킨을 시켜먹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치킨집에 전화 하려다

손가락 멈칫,

A4용지와 40일이 떠오르는데

내가 누운 아파트 거실이 A4용지가 되고

인간 평균 수명이 40일이라는

뉴스를 어디선가 꼭 본 것 같아

나는 그만 아득해지고 마는데





불치병



혀가 하루에 한 치씩 자라 결국 입이 터져버린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혀가 무럭무럭 자랄 때

혀에서 흘러내린 흥건한 침에 발목을 적실 때

돋아난 혓바늘이 번들거릴 때

말이 질질 흘러내릴 때

내 혀도 근질거렸던 것이 발병의 첫 기억입니다

오래지 않아 내 혀도 부풀어 올라 입에서 터져나왔습니다

상대의 입을 겨누었으나 내 입에서 그의 혀가 흘러나와 내 뒤통수를 후려친 것입니다


저녁마다 혀를 조금씩 자르고 있습니다

시인의 멸망을 기원합니다

모국어의 상실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비인칭의 고백



당신은 시체를 본다


뷔페식당에서 당신은 자살을 말하는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

두개골이 함몰되고 두 팔이 없는 운전기사가 모는 만원버스가 지나다니는 도로를 건너간다

밤하늘의 별을 보는 그를 주변 모든 사람들이 힐난하는 걸 당신은 본다


나는 절룩절룩 걷다가 운동화 속 돌멩이를 꺼내 버리고 뛰어갈 방향을 가늠한다


당신은 가장 낮은 바닥에 누워 눈을 감는다

유일하게 가능한 부조리에 대한 고백을 당신은 실행한다

이제 당신은 뺨을 후려쳐도 흔적 하나 남지 않는다


나는 어디론가 뛰고 있고

그는 뻗은 팔 끝 손가락으로 별을 더듬는다

그리고, 당신은 마지막 무표정을 간직한다






제4차 산업혁명



길을 잃었다는 게 아니다

뒤통수는 언제나 무방비다

감정이 아니라 뒤통수의 상황이 그렇다는 얘기다

자동화와 창궐하는 영혼의 감기의 상관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초조해질 때마다

군화 끈을 조여 매는 사람들

군화를 벗어던지고 방구석에 모로 누워 웅크리는 사람들


내가 너로 교체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었다

우리는 지금

헐값의 영혼에 대해

내가 네가 아닌,

그것으로 교체되는 것에 대해

호르몬 영역에서 탈주를 기도하는 사태가

혁명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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