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차 창작콘테스트 시 응모 - 귤의 얼굴 외 4편

by msg_517 posted Jun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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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의 얼굴

두 주간 눈 나리는 계절을 베란다에서 지낸 
아이의 곰보 패인 얼굴

이마 언저리는
새파래졌다가
새하얘진다

그 퍼렇고 허연 얼굴 
귀퉁이를 후벼 파본다
검지 끝에 살점이 붙어 나온다
귀퉁이가 떨어진 얼굴 옆에
노랗고 윤기 나는 얼굴이 있다
그 얼굴에 묻은 살점을 닦는다
얼굴은 금세 윤기를 잃는다
살을 바른다
살을 발라낸다

이제 나는 얼굴을 모르게 된다
이제 나는 껍질을 모르게 된다
 


말의 길이 짧아진다

전신주의 목을 따서 네게 가져갔을 때
내 뒤로 사만 킬로미터의 전신줄이 따라왔다
꿈뻑꿈뻑 조는 눈에
지구를 한 바퀴 감아 오는 머리는
무엇처럼 보였을까

절연처리가 덜된 케이블에서는
문자들이 새어 나온다
숫자들이 흘러나온다

너는 머리를 보며 전신全身을 상상했을까

전선電線은 언제나 전선戰線
말 많은 전주들이 싸우는 곳
말의 길을 훔쳐 달아나자
하나둘 불이 꺼졌다



소회小會에 대한 소회

거기에 구멍이 나 
있었어
검은 구멍이 더 깊숙이 구멍 날 수 있도록
뚫어지게 쳐다봤지
찡그린 눈이 저려오기 시작했어
반짝, 빛이 났어
구멍 너머엔 공동이 있을 거야
확신했지
그곳에 초대받고 싶다고 생각했어
평화로운 사람들을 상상했어

내가 서 있는 곳만 
움푹 
꺼진 것 같았지
누가 내 주위에 금을 그어 
유리된 것 같았지

아아, 그 공동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비밀스런 모임의 참가자가 되는 거야

너의 검은 동공을 보게 되었지
공동 따윈 없는 거였단 걸
그때 그 반짝임은
건너편에서 나를 마주 보던 눈동자
그건 너였지
너의 검은 동공에서, 그 암실에서
한순간 빛이 뿜어져 나왔던 거야

왜 여길 건너다 보았을까
우린 서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너도 나를 보며
공동을 상상했을까
내 눈에서도 빛이 뿜어졌을까
그도 아니면

정말 나를 보고 있었니 



다지증

죄다 다섯 개 손가락을 가진 손들 사이에서
손가락 하나를 더 갖고 싶었지
여섯 개, 여섯 개
합해서 열두 개의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보고 싶었지

그도 안된다면
앞앞이 놓인 두 쌍의 손에서
나의 엄지와 너의 약지를 바꾸자
나는 오른손과 왼손에 반지를 낄 거야
너는 짧고 통통한 엄지로 지장을 찍으렴

그렇게 심드렁한 표정은 짓지 말아줘
속이 부대껴도 토를 하진 말아줘

좋아
이제 나는
손가락 하나를 자를 준비가 됐어
우리 모두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서로 나눠 가지자
집으로 돌아가 침대 맡에 두고 잠을 청하면
내일 우리의 청을 전해 들은 손이 자라날 거야



꿈을 꾸다 만난 적 있는

친애하는 카멜레온 
달맞으러 가야죠
어서 옷을 입어요
밤과 가장 가까운 색을 보여줘요
긴 혀를 내밀어 달을 감싸봐요
달의 맛을 내게 알려줘요
그 축축한 혀에도 달은 차가운가요
자꾸 눈이 감겨도 힘을 내요
낮에는 함께할 수 없는걸요
긴 꼬리로 균형을 잡아요
우리는 하늘을 날거나
죽어버릴 테니까
나는 관심받고 싶어 안달 난 아이마냥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해요
하지만 카멜레온
나는 진짜 당신을 알죠
그리고 이 밤이 짧다는 것도




서경민, sgm04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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