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차 창작콘테스트 빈통장의 동화 외 시 5편

by 이도의꽃 posted Oct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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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무랑루주에서 춤추는 여인의 흰 배꼽과
붉은 장미의 가시
비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교미하는 두 마리의 개와
고장 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흥얼거리는 사춘기 소녀
꽃무늬 몸뻬 바지를 입은 동네 백수와
머리 위에 보따리를 이고 걷는 곧은 걸음걸이의 할머니
바다에 떠다니는 빨간 부표와
새우깡을 먹는 갈매기
먹이를 구하느라 쉴 새 없이 갯벌에서 부리를 젓는 저어새와
낮술 하는 중년 여인의 밀실에서

나는 이름 없는 자유를 보았네




옥수수 밭에서



여름이 무르익던 날
옥수수 밭으로 들어섰지
속이 가득 찬 대공 끝에
새빨간 고추잠자리
은빛 날개 쉬어
일찍이 애인을 기다렸고
시퍼런 물관에
그네 뛰는 분홍 수염
뽀얗게 영글어 가는
속살 감추려
초록 계집애는 겹겹이
포대기를 싸매고 있었지



 

외할머니와 눈깔사탕




오후의 해가 외갓집 뒤안에 있을 적에 하얀 쌀자루는 외할머니 때 묻은 똬리 위에 있었다. 발자국 도장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얼어버린 우툴두툴한 신작로를 지나, 허름한 방앗간이 있는 고갯길을 넘어 읍내에 도착했다. 쌀집에서 쌀과 바꾼 돈으로 굵은소금이 한숨처럼 뚝뚝 떨어지는 등이 시퍼런 고등어 한 손을 사셨다. 생선이라도 있어야 진지를 잡수시는 할아버지를 위해.

고등어 한 손, 비지 한 뭉탱이, 달걀 한 줄
들기름 쩐내가 나는 보자기에 단단히 싸맨 보따리
머리에 이고 넉 고개 구매부 가서 눈깔사탕을 사주셨다
노랑 하양 초록 분홍 동그란 알에 흰 줄무늬
둥글고 커다란 눈깔사탕은 내 입안에서 달콤하게 구르고 있었다.

겨울 해는 걸음을 재촉하여 그 새 가버리고 찬 바람은 연신 고갯길로 불어왔다. 사탕 국물 줄줄 흘러내리는 입가에 연시 빛 노을이 물들고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눈깔사탕 두 개는 넉 고개의 시린 바람을 잊게 해주었다.

사실 눈깔사탕엔 마음이 없었다. 할머니가 막걸리 잡수시고 또, 넉 고개에서 길을 잃으실까 봐 따라나선 걸 할머니는 생전 그것도 모르고 가셨다.



마지막 휴가


구부러진 허리만큼
오래된 나무 벤치

던져진 듯 무심하게
앉아 있는 박 노인

철쭉을 보다가
김 노인을 찾는다

드문드문 까만 머리칼의 임 노인
베지밀을 내밀며

김 노인 작년에 갔자녀

철쭉 한 잎 툭!

떨어진다



빈 통장의 동화


 

구멍 난 통장에는 흡입력이 강한 진공청소기가 산다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던 콩쥐에겐 두꺼비가 있었다던가?

동화책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덮으면 모두 사라지는 나라로

 

 

마이너스 꼬리들이 서로 물고 빙글빙글 도는 통장

검은 숫자들이 조형물을 세우느라 분주했지

훅!

뜨겁고 눅눅한 입김에 무너질 걸 알면서도

 

침 한 방울에 녹아 사라지는 창호지로 만든 통장

허기를 자극하는 침샘으로 공허를 메울 때마다

우르르 쏟아지는 희멀건 삭신

 

임시 계약직, 야근 출근길에

야맹증 걸린 통장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쓰러진다

빌린 집을 뒤로하고 바삐 걷는

빈 몸뚱이 위로

 

금 두꺼비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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