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집
당신의 비늘이 반짝이는 물결 위로
소문 무성한 하얀 집을 지었죠
푸른 정원과 파도소리 우거진 산책로
시야에 신기루같이 쌓이던 성루
한올 한올 엮은 지붕의 해무자락과
보석같은 별빛을 쌓아 올렸죠
성벽에 탁 트인 시야로 창을 내고
고래 울음, 고즈넉한 곳에 귀를 달았죠
풍랑이 거친 날은 날개 옷을 걸치고
파도가 드센 날은 기도를 올려요
나는 밤마다 당신의 처소를 드나드는
별의 무리들과 궁전의 전설을 노래하죠
가끔 심야를 영위하는 소문이 파다할 때
새벽을 일깨우는 조류의 일성같이
포획선으로 부터 고래의 전리품을
수평선의 해무 더미에 가두곤 했죠
궁전뜰에 낭자한 섬초를 산책하다 보면
홀연히 대지에 축조된 경계에서
해무로 짠 지느러미가 퍼덕여요
할머니의 무릎
천상으로 굴러 다니던 옥돌이
세월에 닳아 반들해졌어요
투명한 별무늬같이
고난에 부대낀 상흔이 반짝거리죠
관절의 기능은 쇠퇴했지만
저 단단한 삶을 지탱해준 지축처럼
어린 생명을 어룬 요람은
응석을 품었던 놀이터였죠
마당같던 무릎은 늘 존엄해요
닳아 버린 세월이 쇠약해 지고
사포같은 무릎이 반들해질 때까지
할머니의 헤진 시간은
위대한 공간을 문지르고 있었죠
맛있는 것은 늘 양보하시던 할머니
세상이 너무 낡아 너덜해 졌어요
바퀴의자에 기댄 노년이 서러워질 때면
스스로 무릎은 거두어 들이고도
세월에 굴복하지 못하던 저 탱탱한 무릎
니들 행복이면 그만이라 시며
끝내 두 무릎을 가지런히 뉘었죠
눈물 보일까봐
흰 연기로 하늘을 가리시고...
하굣길
호기심이 갯바위에 까맣게 붙었다
교실의 아이들이 뻘밭에 철썩이고
검은 물떼새에 발목이 시린 바다
바다가 아이들에게 뛰어 든다
아이와 아이의 틈에 발견된 장난기를 따라
밀물이 발목부터 젖어들기 시작했다
갯바위는 꾸러기를 뒤지고
숨겨진 바다 뒷편으로 뛰어 드는 아이들
갑각류는 불뻘을 헐레벌떡 달리고
연체동물이 젖살처럼 끈적일 때
수평선을 넘어오는 고동의 전파음이
술래의 등짝에 자글거리던 푸른 눈빛에
은빛으로 달려오던 파랑이 들킨다
썰물에 스미던 동심의 시간
돌아온 포구에 만선의 깃발처럼
호기심이 들숨과 날숨을 부려 놓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돌아보면 철썩이는 갯펄의 호흡들마저
휘파람으로 지나가는 편서풍에게
쉿! 하고 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가슴속의 발화
당신의 두상이
하나의 성냥개비같다
스윽 그으면
화르르 사를 것만 같은 발화
온난화의 기저에
불의 씨앗이 으르렁 거린다
발화점에 매개의 진단이 내려지고
그 폭염의 기세는 당당하다
나태해진 이들의 등살처럼
솜털에 붙는 불씨처럼
순수의 여린 발화점이 뜨겁다
당신의 족적이 화마의 흔적처럼 검을 때
숯불같이 검붉게 오르는 잉걸에서
그리움은 죽순처럼 새살이 돋다
화염으로 휩싸인 두려움이란
허무를 담당하는 성냥갑처럼
폭염의 기세가 오랜 기억을 불러 올 때면
당신은 빈 가슴으로부터 침묵한다
불볕의 계절이 질척이면
내게로 부터 번져가는 너의 화마
단풍의 미각
길 걷다가
불 타는 나무를 보았네
사랑이 열리는 나무
불똥이 뚝뚝 떨어지네
급기야 불덩이 한 아름 주웠네
사랑이 불길로 번지네
발길에 밟히는 불같은 사랑
가슴이 까맣도록 타네
온 몸이 불덩이로 익어 가네
세상이 온통 붉은 맛이네
화끈한 맛의 불덩이
이윽고
사랑이 갈증으로 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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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