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한국인 제26차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눈사람> 외 4편

by 체리 posted Dec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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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눈사람이 십이월의 햇살을 뜯어 먹는다

나뭇가지 손가락에 돌돌 감아 먹는다

 

가까워지는 햇빛의 발소리에 젖어 몸이 점점 작아진다

머리에 불을 붙이고 녹아가는 생일 케이크의 양초처럼

눈사람의 머리엔 태양이 내려와 그를 녹인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만이 사람을 만들 수 있다

어두운 밤에도 희게 빛나는 달을 닮은 사람

그는 달에서 온 걸까,

달의 박자에 맞추어 그는 작아졌다

 

코트를 입히거나 슬픈 영화를 틀어 주는 것은 눈사람을 죽이는 일이야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낮잠을 자는 일은 자살 행위고

햇살 밸브를 완전히 열어버리는 금요일도 역시 살인마지

그는 이런 농담을 자주 하곤 했다

 

이 흰 달과 함께 살아가는 그의 운명에 대해

말도 없이 왔다가 말도 없이 사라지는 그의 삶에 대해

나는 봄에 가까워지도록 달력을 넘기며

창밖의 눈사람들이 유서 쓰는 소리를 듣는다





살구나무 세탁소

 

살구나무 세탁소 창마다 옷걸이가 걸려 있네

 

오늘은 살구나무에 꽃등이 켜지고

세탁소 여자는 봄의 옷들을 꽃잎처럼 다리고 있네

 

먼지를 달고 사는 종족들만이

세탁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구나무는 알고 있을까

 

헐거운 신발을 신고 있는 세탁소 여자,

촘촘하게 공중에 떠 있는 꽃잎의 그림자에 갇혀 있네

 

여자의 숙련된 손길은 옷을 다리거나 세탁하는 일이

혹처럼 달라붙는 일상이었다네

 

봄밤을 어루만지는 세탁소의 연기들이

뭇별 뜬 하늘에 걸려 있네 다림질 잘 된 실크처럼 떠 있네

 

정물화처럼 늙어가는 여자, 그러나 살구꽃은

골목의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추네

구석진 자리에 고인 얼룩의 그림자가 도망치네

 

오늘도 흩어져 있던 4인용의 가족들을 잘 다려놓은 여자,

천장에 매달린 옷들이 서로를 껴안고 웃고 있네





흙무덤

 

포크레인이 구덩이 판다, 깊이 깊이 판다

죽음이 깊게 잠길 수 있는 구덩이 속으로 돼지들이 들어간다

 

벌써 아가리를 쩍 벌린 구덩이, 지붕과 나무와 감나무의 그림자를 삼킨다

여기는 돼지의 무덤이라고 비명이 말한다

 

아직 죽은 돼지는 없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상냥하게 종알거리는 새끼 돼지들도 있다

꼬리의 곡선이 하늘거리고 있다

그러나 목이 마른 채로 구덩이에 잠기는 돼지들

 

급기야 포크레인이 흙으로 덮는다

구덩이를 차고 뛰쳐나오고 싶은 돼지들,

몸이 홍시처럼 붉디 붉어졌다

발악을 하느라, 똥과 오줌이 범벅이 되었다

 

구덩이는 이제 흙무덤이 되었다

그날부터 우리 집 한켠엔 소주병이 차곡차곡 쌓인다

잠결에 구덩이를 뚫고 나오는 돼지 울음 소리가 들린다

 

꿈틀꿈틀거리는 구덩이, 한 사나흘이 지나자

흙무덤에서 혼() 빠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지붕 위의 소금쟁이

 

걱정 없이 물 위에 떠 있다

 

물의 바깥이 소금쟁이에겐 지붕이다

지붕을 밟고 있는 소금쟁이들은

가장자리를 좋아한다

 

지붕의 난간을 좋아하는 아버지,

소금쟁이처럼 지붕에 떠 있다

못 자국을 밟는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아슬아슬하다

 

큰 몸집의 그림자를 끌고 다닐 때,

목숨의 깊이를 재어 보고 현기증을 품는다

 

망치질을 하느라고 손톱엔 채송화꽃이 피고

발바닥에는 헛디뎠던 하루들이 가득하겠지

 

발 밑에 찰랑이는

물의 기척을 좋아하는 소금쟁이처럼

아버지는 오늘도 지붕의 척추를 바로잡아 주고

항상 날씨를 읽어내는 힘으로 지붕을 짓는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지붕 위를 떠다니는 검은 소금쟁이라고 불렀다





폐허의 집

 

이마에 산마루가 깊게 패인 할머니는 눈에 눈곱이 자주 낀다

소매를 까뒤집어

눈곱을 닦는다

할머니는 눈 앞에 시커멓게 빛나는 검불이 돌아다닌다고 했다

귀신이 아닌지도 몰라

귀신이 아닌지도 몰라

 

추녀 끝 거미줄에 달이 걸린 저녁

모깃불도 놓지 못하는 할머니,

별처럼 말을 잊고 허기를 잊고

허리 구부러지게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갓을 쓰고 오는 귀신이 오는지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캄캄해지기 시작한 처서의 밤

귀뚜라미와 풀벌레 소리가 이슬을 부르는데

솜이불을 덮고 자는 할머니,

더 이상 오지 않는 죽음을 거느리기 위해

검버섯이 짓무르도록

혼자 살고 있다

 

무덤에 가 눕고 싶어도 누울 자리가 없다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기에

할머니는 폐허의 집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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