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우리가 콜타르 냄새에 식욕을 몰아내던 텁텁한 거리에서 만난 것은
많은 이들이 예리한 말들을 맡겨두고 돌아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떨림 한 덩어리
나를 담았던 거죽을 뚫고 미처 사랑조차 배우지 못한 몸은
발라져 버린 근육 아래로 영혼이 새나가는 것조차 무신경하다만
가슴으로 떼 지어 몰려오는 고뇌 속에 자비 없는 시간만이 다자꾸 증발한다
창밖 가득한 꽃잎들에 빗물 주는 아침
도요새를 품고 이내 벌거벗은 저 구름 한 점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그대 생각에 조용히 입안 살점을 씹는다
이제와 회상컨대 당신과 걷던 가로수 가지가지마다
차갑게 젖은 말줄임표들이 빼곡하게도 돋아있었다
대일밴드처럼 질문을 떼어가며 그대는 무슨 표정을 지었던가
가슴 속 응접실로 서로를 초대해주지 않던 날들은
허기와 함께 밀물이 되어 오가는데도 말이다
청맹과니 두 눈은 태양에게 주고
듣지 못하는 귀는 바람에게 바치고
끝내는 가닿아야 할 낮 없는 낮, 집 없는 집
어느새 석양 너머 길잡이별은 호를 그린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뜯어진 채
별빛들은 강가에 부딪쳐 깨져 가는데
왜 이토록 밤은 캄캄하더냐
잔뜩 취해 말라버린 의식 속에
나의 계절은 찢겨 버려진 책들로 가득 차 있다
떨고 있던 가로등 아래서의 고백처럼 아직 사랑을 믿는다면
내 더럽혀진 계절에 당신의 부서진 홀씨를 심으련다
언젠가 씨앗이 내려앉은 오래된 오후의 가녘에서
잠꼬대처럼 꽃 한 송이 피어날까
-선인장-
그토록 완연한 가을이 왔는데도
당신의 꽃은 여전히 피어날 생각조차 없군요
무엇이 그리 서글퍼서 침묵하시나요
말씀이 없으셔도 나 홀로 짐작컨데
잎사귀에서 꽃대궁으로 몰려가던 당신의 마음도
잎자루 어디쯤에선가 혀를 깨물어 결국
꽃 대신 멍울같은 가시가 돋아난 것이겠죠
못내 아쉬워 한참 눈물 한모금 흘려보낼 때, 당신께서 오셨어요
그 날은 앞마당의 성긴 잡초들을 뽑고 있을 때였는데
당신은 조용히 담장을 넘어와 내 등을 가만히 두드리셨죠
나는 마침내 그대를 끌어 안을 수 있었어요
당신의 꽃잎 대신 피어난 가시로 말미암아
내 몸에 새겨지는 수 많은 점들
비로소 당신 몸을 빠져나와 살아 숨 쉬는 가시들
정말이지 아프도록 아름답군요
-아침의 탱고-
새벽 이슬에 흠뻑 젖어 간신히 능선을 넘어온 햇살은
앞마당에 서 있던 수양벚나무 성긴 가지 위 둥지를 틀고
눈부신 제 깃털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 잠깐의 휴식이 하도 황홀하여 한발 다가서자
일렁이며 떨어지는 빛에 그만 눈이 멀 것만 같아요
슬쩍 뒤를 따라온 그림자는 자꾸만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따끔한 성화에 못 이겨 난 인영의 허릴 감싸 안아 탱고를 춥니다
자주달개비 꽃잎 떨어지는 것이 슬퍼지는 계절
나는 이렇듯 온몸으로 시간을 받아넘기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혹시 알까요
패랭이꽃 피고 지는 모습이 더는 못 참아 싫증날 때
그대 조용히 날 찾아와 손 잡으며 춤을 청하실 지
-배꼽시계-
혼 빠져 혼 빠져
시방 시계가 날 노려보기에 질까보냐 눈을 치켜떴소
근데 갑자기 파자놀이 하듯 분절되는 모양새가가만 보이 잗다란 톱니바쿠꺼정 세세히 보이요
내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인지라 눈만 끔뻑거렸지
시침 분침 초침이 온몸을 찔러대는데
내 무에 잘못 있다고 말벌마냥 이리도 괴롭혀
하도 따끔거려 핏방울이나 지렸나 싶었더니
별안간 숫자들만 퍽퍽이 새나오는 게 아니겄어?
거 암만 신기해도 끔찍시르워 이거 놔라 놔라 카능데
배꼽 붙은 데 떡하니 자리잡고는 하능 말이
그 입 다물라
어허
내 나무늘보마냥 게으른 것이 그리 큰 죄요?
어쩌다 배때지에 이리 숭악한 것이 달렸소?
초침이 말하기를
네 무에 잘못 없다만 허송세월 한 것이 얄미워
이래 찔래댕겼으니 똑띠기 살으라
허허 참
걱정은 고맙다만 난 이래 사는기 좋소
당장 배때지에서 안나가모 내 본때기를 보여줄끼요
암만 따굽게 내를 괴롭혀도
천성을 어쩌겠소
앞으로도 계속 난 이래 살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