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주년 외 5편

by 홍선민 posted Jan 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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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주년

나는 라디오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나는 하늘에 수놓인 검은 전선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집니다.


나는 남겨졌습니다.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들은 내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영웅인 저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 1호선 인천역에서 첫 차를 탑니다.

자랑스러운 영웅인 저는 신문을 줍고, 갈색 파지를 주머니 속에 꾸역꾸역 넣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받는 나의 살아남은 댓가는 팔천원입니다. 운이 좋을 때에는 더한 수익을 받기도 합니다.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들, 나는 허물뿐인 영웅이라, 라디오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쿵짝쿵짝 노래소리에 집중을 허지 못하고 그 시절의 전투 지시 방송이 떠오릅니다.


총대를 들고 악을 쓰고 동지가 죽는 모습을 보고서 가슴을 쳤음에도

이까짓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한 나는 허물뿐인 영웅입니다. 

 

 

 

나라를, 가족들을, 나의 누이들을 지키는 영웅이 되겠다는 포부로 총질을 하였던 나는 지금

빈 전철을 전전하며 당신네들이 보고 버리고 간 신문을 줍습니다.


그 날 이후 64주년을 맞는 지금 나의 마음만은 영웅입니다.


나의 마음은 자랑스러운 6.25 참전 용사입니다.















가출 청소년


사실 나는 알고 있어.


제발 좀 말 좀 들으라고, 내가 하고 싶어하는 꿈들을 찢으며 타박하는 엄마의 말도,

내가 저런 걸 왜 비싼 돈 들여 딸로 키우고 있는 지 모르겠다는 아빠의 타박도,

밥과 시간 거덜내지 말고 돈 벌어다 줄 거 아니면 제발 좀 꺼지라는 오빠의 비난도,



그런 의미가 아닐 거라고 알고 있어.




그리고 또 나는, 우리 집에 더 이상 필요 없다는 화를 받고,

울다가 홧김에 집에서 뛰쳐나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그래도 엄마와 아빠가 날 다시 찾아줄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때가 탄 옷을 아직도 입은 채로 들러 잠깐 들여다 본 집 한 구석을 보고,


모두 하하호호 웃으며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의 모든 희망은 무너졌던 거야.





사실…….

나는 알고 있어.


시도 때도 없이 매를 들고 작은 숫자 안에 나의 인생을 잡으려 하던 엄마가,

나의 꿈을 이루어주기에는 돈이 아깝다고 화를 내며 욕 하던 아빠가,

집에만 들어오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단 표정으로 나를 위 아래로 훑던 오빠가,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엄마, 이제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을거야.


나는 이제 그 집을 떠나 날 필요로 하지 않는 엄마, 아빠에게 마지막 효도를 할테니

설령 혹시라도 나를 찾지는 말아.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우리 집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어.

이 추운 거리를 전전하며 떠돌면서, 가끔은 그리워 하기도 해.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서 떠날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앓고 있어.


난 모두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걸 알게 되었을 땐 이미 심하게 앓고 있었어.











사디즘 프레지던트


개미가 자꾸 조잘거리기에
양쪽 입을 늘려 갈래로 주욱 찢어놓았다.
혓바닥을 뽑아놓으니 이젠 떠들지 못할 것이다.
통쾌해!

개미가 자꾸 시위를 해대기에
두건 두른 이마를 탕탕 구멍을 만들어주었다.
이젠 뇌가 없어졌으니 내 말을 거역 못하겠지?
멍청하군!

개미가 나를 대장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봐
이 만만한 개미들의 약점을 이용해 거짓말을 하였다.

개미집 건축 시 흙값 대폭 인하!
개미들의 개미 땅과 도로 통행비 절감!

"무조건 개미들의 말은 다 들어주겠노라!"
감동받은 개미들의 후원속에 내가 개미 대장이 되었지!

왜 이제와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아차차, 내 공약(거짓말)이 뭐였더라?

저까짓게 화를 내기에
모조리 꽁꽁 묶어 벼락에 던져놓았다.
이제 까마귀들이 그들을 잡아먹어주어 날 방해하지 않게 도와주겠지?

머리가 뚫리고, 입을 막아놓아도
계속 버릇없게 나의 퇴진을 감히 외치기에

내가 내 귀를 막았다.

귀찮은 것들.

내일은 어떤 놈을 까마귀 먹이로 던져줄까?









관순아 울지마라

 

관순아 울지마라!

하늘에서 관순아, 너는 울지마라.

설마 목숨을 과연 종잇장도 못하게 생각하여 네가 그리 조국을 그리며 가버렸을까?

 

관순아 울지마라!

네가 지킨 이 세상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부숴라 깨뜨려라 소리지르며 악을 쓰는 악국이 되어버린 지금을 천국에서는 보지 마라.

 

열아홉의 나이로도 나라에 목숨을 던진 관순아!

지금은 구십살의 나이를 처먹어도 나라 소중한 줄 모르는 노인네들마저

너를 잊고 산단다.

 

관순아, 하늘에서는 울지 마라!











편지 한 장을 보내주오

 

눈이 멀어 글을 볼 줄도, 팔목이 없어 글을 쓸 수도 없는 늙은 나를 위하여

그대 편지 한 장을 보내주오.

 

내 꼭 찾아가마 약속하여 놓고, 모습이 흉해 갈 수 없는 내 딱한 처지를 보아서라도

그대 편지 한 장을 보내주오.

 

계집아이 딸은 이제 제법 조숙한 숙녀가 되었을 것이오나, 그 앞에 애비다 한마디 못 할 내 불쌍한 모습을 가엾게 여기어

그대 편지 한 장을 보내주오.

 

전쟁통에 팔이 잘리고 눈을 잃었다 내 어찌 이실직고 하리오?

 

그대 편지 한 장을 보내주오.

 

나는 걱정하지 말아라,

이 무서운 총탄이 끊이고 우리네들이 새소리를 내는 그 마지막 날에

고기 반찬을 싸들고 내 두 발로 찾아가마.


그 날까지 몸 성히 있으라는 내 편지를

그대 부디 남지(南地)에 보내주오.




민 선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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