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손
새끼손가락은 언제 굽어졌는지도 몰러
그런 거 어디 신경 쓸 여력이 있었간디 하며
넋 놓고 물어 본 이 마음에
그 옛날 무쇠 솥에서 펄펄 끓이던
뜨거운 물 한 동이를 이 마음에 들어부으신다.
여전히 바쁜 허름한 손이
주로 하는 일은 거친 농사일.
어쩌다 자식들 오면 주기위해 담그는 겉절이 맛은
오지게 투박한 손에서 나온 맛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여리고 달기까지 하다.
올 겨울엔 곶감을 8접이나 깎아냈다는
여전히 기골이 장대한 그 억센 손.
하지만 그날
당신의 지나온 인생의 헛헛함을
불현 듯 꺼내놓고선 미처 수습할 길 없었건만
낡고 허름한 그 두 손이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닦아주던, 굽은 손가락이 함께 했던 그 손.
아직도 노구의 몸이 움직이는 한
그 바스라질 것만 같은 허름한 손은
어쩔 수 없이 또 한 시절 그렇게
바삐 움직이리라.
그게 그 노구의 손이 사는 길이리라.
시골풍경
무공해 청정공기는 본래면목이요
새초롬한 새벽 찬 서리는 까짓 것 덤이니라.
저 너머 보이는 푹신하게 잔디 깔린 아무개 조상님 묘소는
다가올 봄날 질펀하게 드러누워 한숨자기에 딱 좋은 명당자리.
하아~ 속이 뻥 뚫리누나.
낡은 집 사랑방 괘종시계는
언제서부터 멈춰선 건지 알길 없어서
저걸 살려 말어 망설이는데
괘종시계 앉은 자욱한 먼지들 득달같이
달려들어 하는 말이
놔둬라, 아서라, 그냥 이대로가 저 늙은이가
사는 길이라며 내 어깨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하아~ 감히 제가 몰라 뵈었습니다.
뭔가 신비로운 한 세계를 품고 있을 듯한
녹 슬은 손잡이가 일품인 광을 몰래 훔쳐보다가
순간 훅하고 밀쳐내는 무언의 손길.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고 이내 줄행랑친다.
광속 신령님은 속세의 이 얄팍한 속셈을
그렇게도 알아채신 듯.
하아~ 감히 제가 큰 죄를 지을 뻔했습니다.
이름도 가지각색인 시골 밭님들.
가만히 들여다봐도 뭐 하나 나올 거 같지 않던
허접한 몰골의 그네들 얼굴.
한참 만에 다시 찾아가 본 그곳엔
비록 시골 촌로의 농사철학으로 비료는 잔뜩
뒤집어썼으나 어디 그것만이 7할이었겠는가.
숨길 수 없는 이 대지의 위대함이 발현해 일군
촌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모든 것들이여.
내 좋은 것들
남루한 시골집 돌 마루 틈에서 자라고 있는
안쓰러운 민들레를 좋아한다.
봄비가 완연하게 온 어느 날
강심장을 가진 수변 길 작디작은
달팽이와의 산책을 좋아한다.
엄마 잃은 외로운 새끼강아지의
처연하고 외로워 보이는 그 눈동자를 좋아한다.
그 가을의 흔적을 미련 없이 떨쳐버린
메마른 갈대의 몸을 스치며 걷는 걸 좋아한다.
봄날 풍광이 기가 막힌 어느 무덤가에서
은근슬쩍 대자로 누워
그 봄 그 하늘 그 숲속의
알 수 없는 소란스러움을 느끼는 걸 좋아한다.
어부는 늙어버려 출항 할 일이 없어진
하지만 그 마음속엔 언제나
망망대해를 품고 있는
덩달아 늙어버린 초라한 땐마를 좋아한다.
내 피 끓는 외로움이
죽을 거 같은 고독감이 드디어
시라는 생명 줄을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인정받지 못한 외 사랑일 지라도
곁에서 평생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눈물 나는 내 진짜 사랑을 좋아한다.
몸을 시원스럽게 관통하는
봄을 기다리는 어느 3월 밤 창가에서
숨은 청명함을 간직한 그 까만 밤
그 영롱한 달빛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 옆 작은 꼬마별 애써 빛을 발하지만
달빛이 오늘 유난히 밝다.
저다마 어디로 흘러가는지 방향을
유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닮은
이름 모를 여울들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감사
그래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주는 것들이 있어서
이세상은 그래도 살만하지 모른다.
그게 사람은 아니다.
겨울나무
그 계절을 벗어버리고 있다.
미련을 못 버린 가지 끝엔 낙엽을 달고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고야 마는
봄의 속살을 드러낸 채.
담쟁이
척박한 동토의 땅 시멘트 벽에 핼쓱한
모습을 하고도 어김없이
내 아기 이 몸 안에 처음 생겼을 때
앙증맞은 손을 닮은 모습으로 또 다시 태어난다.
내 발 밑
고스란히 자기 몸을 뉘인 채 사람들의 마음에
꽃길을 만들어 주는
강해보이지도 진하지도 않은
여리 디 여린 연분홍의 순결한 그님들.
지나가던 봄바람 그 모습 애처로워
가만가만 흔들어 보지만 소용없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은 얼어붙은 대지를 밀고 올라오는
부드럽고 연한 것들로 인해
또다시 따스해진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지쳐갈 쯤
그렇게 자기들의 시절을 포기한
때 이른 봄일지라도.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어릴 적 비 오는 신작로 길을 걷는 게 싫었다.
주변은 음울한 기운으로
두려운 눈빛을 가진 아이를 향해 스산한 바람마저 불어 댔고
난 그저 우산에 바짝 매달렸다.
가끔 혈색 좋은 지렁이가 같이 동행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길을 가고 있었던 거 뿐.
바다를 좋아했지만 폭풍우 치는 그 바다를 볼 때면
진저리가 쳐 질만큼의 두려움을 느꼈다.
잔잔했을 때도 그 바다는 나를 집어삼킬 수 있었던
이중적인 모습이었기에.
그리고 어디까지나 바다는 그 세상의 물갈이를 하고 있었던 거 뿐.
나를 향한 그 찰진 손길은 진심이었으리라.
아버지의 마지막 상여 소리는 내가 들어 본
그 어떤 곡조보다 진정성이 있었다.
아련한 종소리 하나만으로도 떠나보내는 이들의
처연함과 슬픔을 대변하기에 충분했었던 듯.
하지만 어디까지나 죽은 자는 듣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만이.
내가 좋아하는 빛깔은 녹색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해보니 뼈 속까지 회색으로 들어 찬듯하다.
내 모든 생각과 미소와 몸짓은
편리에 따라 숨겨진 검정과 흰색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철저한 회색분자였음에.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그저 솔직한 거 뿐.
조금씩 이렇게 솔직해 질 테다.
* 이혜경
* 010-3215-7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