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차 월간문학 콘테스트 시부문 응모합니다.

by 김파랑 posted Mar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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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선 안에서



어제는 밤늦게 젠가를 했어요

각자의 손등 위에 각자의 잔을 두고


기구한 사람 옆에 기구한 사람 옆에 기구한 사람……

얼마나 더 기구해져야 용서해줄건가요?


너 아주 작정을 했구나?

나무 수저로만 밥 먹는 여자가 한 입 권해요

먹을수록 살고 싶어지는

쌓을수록 무너트리고 싶은


사실 나는 멸망한 왕국의 손녀쯤 되는 것 같아요

여기엔 내가 아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너무 좋고 너무 무서운


한번도 가본적 없는 왕국의 식사예절을 떠올리며

나는 빼낸 젠가를 반절 부러뜨리고

……모르고 한 잘못은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는 실컷 각자의 불행을 끄집어 골라낸 다음

쌓아올리고

누가 가장 불쌍한지

이정도면 무너져도 된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한번도 본 적없는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어요


아무도 치울 생각 없는 젠가 옆에서

사람들은 우르르 잠들어요



가사 안드로이드


M은 졸업식이 끝나면 안드로이드가 되기로 했다

요긴하게 쓰이진 않아도 썩 괜찮은 영원이 되고 싶어서


누가 요즘도 안드로이드로 취직을 해?

Q가 식사시간에 물었다

이젠 밥 먹기 싫어서……


너무 긴 졸업식이었어 그치?

M은 운동장에 프리지아 한 다발을 심어두고 뒤를 돌아본다


사물함에 넣어 놓은 여름

유통기한 지났을거야


언덕 맨 아래에서는

비가 내릴것 같다


D에게 졸업 선물로 받은 2인용 우산

이게 요즘 유행이래

괜찮아 이젠 집에만 있을거니까


사물함 같은

아껴 먹고 싶은 여름이 산재한 집


처음 보는 가족이 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모르는 안드로이드에게 인사 건네는 가족


M은 이제부터 여기에 살게 되고

이 가족이

머리 맞대고 조심조심 늙어가는 걸 보면 된다

거실 소파와 나란히


무릎이 아프면 우산을 몰래 가방에 넣어 놓을게

보고 싶을 때

눈 돌리면 옆에 있는 할머니처럼


M은

자신의 방으로 안내 받는다

방문에는 [ M의 방 ]

이라 적혀있고


그 글씨체는

꼭 M의 졸업식에 오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쓴 것 같다



능소화 무덤차


담장 밑에 쪼그려 앉아 입술을 뜯는다

그러면

순식간에 여름이다


너는 잘 익은 여름을 건넨다


그걸 즙 짜서

향수 공병에 담으니

티 포트가 되었다


능소화 향이 난다

향으로 담요을 짜

나는 그 위에 앉아 차를 마신다


능소화무덤차

찻말 : 살아남는 게 제일 어렵다 거기에 흥미가 없다


네가 걷던 골목길을

혀로 찬찬히 더듬어 본다


되는대로 걸으며 산책했다

너는 대충 걷지만 꾸준히 걸었다


줄곧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마지막 모금을 넘기면

아직도 여름인 척 하던 게

그대로 굴러 떨어진다



4차선 도로는 영원한 아이슬란드


여름을 장만하려고 스쿠터를 타면서

민민과 나는 시장을 돌았다


작은 시장에 작은 고양이 작은 개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데려갈 수 없는

시장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스쿠터의 역할은 거기까지


이걸 타고 아이슬란드까지 갈 순 없잖아?


대신 출근을 했다

여름 대신 개와 고양이를 장만했으니까

만오천원어치 새로운 식구들

다음 계절을 아이슬란드에서 보내길 바라는

민민까지 넷이, 넷이라는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 밖에서


사람들은 해가 뜨자마자 일을 시작한다

백야가 오면 얼만큼 일해야 하는거지?

민민의 걱정에서

나는 기다리는 사람의 일과를 보았고

거기에 가면 잠만 자자

밤과 낮을 밤과 낮이라 부르지 말고 잠만 자자고

약속했지만


어디든 가려면 일 해야 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일을 한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스쿠터만 탔다


일을 주니까

그러면 아이슬란드에 갈 수 있으니까


민민이 가고 싶다 했던

그래서 나도 가고 싶어졌던

아이슬란드

조금만 기다리라고 기다리면 갈 수 있다고 말할 때

얼마나 더 큰 기다림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면서

나는 함부로 기다리라 말하고


민민은 대답하지 않고 잠들었다

일이 늘어날 수록

민민의 자는 얼굴만 늘어나고

기다리는 사람의 잠든 모습을 보는데

우리는 이제 기다림의 얼굴로만 대화하는데


아이슬란드에 가려고 스쿠터를 장만한 건 아니었다고

개와 고양이는 원래부터 5천원이 아니었을테고

민민은

기다리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고


알면서도

나는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 아이슬란드에 가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 민민을 기다리게 하려고 사는 사람

마냥

스쿠터 밑에 깔린 도로가 끝나지 않았다



극야


그 저녁에

아주 뜨거운 국을 끓였다


어디에는 누군가의 결혼식이 이뤄지는 것 같았고

나는

누워도

일어나도 깜깜한 상황이었다


불꽃에 의지해

아주 뜨거운 국을 아주 오래 끓여야했다

계절이 없는 나라에서도

제철 음식을

해 먹자며

약속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손이 기억이 안 나고

국자를 젓는 내 손이

자꾸 졸아드는


그런

저녁에는





김파랑

rimgor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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