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차 창작 콘테스트 시 부문 응모

by 하여랑 posted Aug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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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깊이 파기 위해 삽을 던져버렸다

 

 

나는 평생을 시름에 빠진 맹인이었다

 

그날의 수학 시간엔 반복되는 덧셈 뺄셈에 질려 응용문제를 풀겠다며 떼를 썼다

 

마주한 복잡다단한 문제의 해법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빨간색 색연필은 가위표를 그리기 일쑤였다

 

계단을 오를 때면 뾰족뾰족한 단들을 반듯하게 밀어 처음과 끝을 맞추어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주한 밋밋한 계단은 그저 또 다른 험한 언덕길이었기에 가는 걸음걸음에 기대하던 생략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평생을 힌트를 구걸하는 학자였고

또 나는 평생을 요령에 맛 들인 곡예사였다

 

차라리 푹 젖어 찢어질랑 하는 시험지를 풀겠다고 우겨대는 수험생이었다

 

교과서에 작게 쓰인 글씨들을 하나도 읽지 못하였기 때문에 길을 잃곤 했다

 

평생이 시늉에 그쳤고 깊이를 잃어 대충 값을 부여받고 퉁쳐졌다



2. 골 썩은 불쾌함

 

 

골 썩은 불쾌함입니다

끈적끈적하군요

엊그제 비워두는 것을 깜빡 지나치고 말았거든요.

딱 반나절만에 날벌레가 그득그득 역겨운 꼴이 되어 버렸군요

이따금 보이는 것과 실제의 현상 사이에 벌어진 갭이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먼지가 풀럭이는 입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깁니다

아아, 이미 썩어 부패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그대로 남겨두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는 없지만 비슷한 핑계는 하나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끈덕지게 눌어붙어 있군요 엿보고 싶은 까닭은 없습니다

섣불리 고쳐 세우기엔 지저분한 흉입니다

골 썩은 불쾌함이군요

닦을 걸레를 곧 준비해야겠어요, 엉켜버린 자리를 끊어낼 가위도 필요하겠군요

그렇지만 그것을 살 돈이 없을 텐데요

물질적이지만 물질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도리어 관념에 가까운 것이니 걸레와, 칼이면 되겠습니다 사실 아무런 쇠붙이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지는 태양의 온도가 5도쯤 내려갈 때까지만 잠들었다가요

거참, 눅눅한 침대 위에서도 속 편히 누워계시는군요

고지식하시군요, 지긋지긋하니 저는 이만 순서를 바꾸어야겠어요,

부디 안녕히



3. 바나나를 벗겨내면 하얀색이지

 

 

솔직한 것이 좋다

성가실 때면

곧바로 발톱을 추켜세우는 고양이의 예민함이 사랑스럽듯

 

끝없는 표출에도

한줌 속앓이 덕에

매일 밤과 낮은 익숙한 가식을 긁어내는 작업에 열중했다

 

제 살을 파고들어

붉고 거무스름한 핏방울이 맺혀도

쏙쏙 뽑히는 쾌감에 그만 중독되어 관둘 수 없다

 

본래 어떠한 빛깔이었건

알게 뭐람,

바나나를 벗기면 흰색일 걸

노란 껍질은 곧 검게 물들고 알맹이는 씹어 삼킬 테지만, 그래서?

 

차마 깊은 곳 박혀있는 것까지는 뽑아낼 자리가 없었다고

 


4. 덜렁거리는 이름표

 

 

물고기는 잉어라고 생각된다

토마토가 과일인 것처럼

실은 채소들이 토마토라 생각되었다

그 어디 그어지지 않은 경계 위에서 네게

지나가는 행인이었다가

세계를 건너는 순간에 물고기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하야 나는 네가 되었다가

우주의 텅 빈 하늘을 찢고 손을 내미는 결함이 되었다

더러 잉어는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쯤인데

태양과 지구 사이를 헤엄치면 조각난 먼지쯤 되려나

보통 잉어는 물고기로 생겨났다 죽는다



5. 스테이크를 만드는 완벽한 조리법

 

 

젊은 요리사는 매일같이 어제와 내일이 같은 메뉴들을 메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방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성실한 일꾼으로 지내면서는

 

몇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알아도 모른 척할 것,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할 것

 

눈대중으로 스테이크에 뿌린 소금의 양이 어제는 3그램이었다가 오늘은 30그램이 되었다

 

아뿔싸, 실수다

 

오후 시간까지 손님 테이블에 올라갈 채소를 먼저 다듬었어야 했는데 일이 미련하게 늘어지겠군

 

제 성질을 다 버리지 못한 나물에서는 풀 맛이 흉흉했고

깊이를 잃은 수프에서는 요란한 시늉만 남았다

 

내일 젊은 요리사는 스테이크 위에 소금 대신 설탕을 뿌릴 것이고,

 

설탕이 발라진 두툼한 고기를 베어 문 손님은 피어오르는 육즙과 감칠맛에 감탄할 것이다

 

스테이크를 만드는 조리법은 완벽했으니

 

여전히 주방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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