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차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공모 <찢긴 날개> 외 4편

by 학생이c posted Jun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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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긴 날개

 

 

나는 당신이 병나발을 입에 물고

전봇대 밑에서만이라도

누워 잠들기만을 기다립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당신을 마중하는 여자이자 부인이 됩니다

 

여자의 손에서 여태껏 쏟아진 맥주 병뚜껑

거품처럼 짙게 깔린 어둠을 손으로 휘어보면

당신은 한 병에서 곧, 두 병째에요

굳이 코끼리 코를 도겠다는 당신을

밤거리에서 목격합니다

이게 바로 라이트 형제의 비행 정신인가요?

당신은 밤을 운항하는 빌딩 앞 나무 밑에까지

수북이 쌓인 캔들에도 굴러들어오는데요

마스크를 써 보지 않겠어요?

분리수거가 안 되는 찌꺼기 같은 날들이

당신의 입에서 맴도니까, 맡아보세요

얼마나 술값을 지불했으면

그 값을 충당해야 할 냄새는

병따개로 따놓은 술병만큼 떠나지 않아요

집에 빨리 안 가려는 당신의 수작이겠죠

 

길을 잃어봐야 당신은 알 테죠

잠그지 않은 대문처럼

마음이 꼬일 대로 꼬였을 여자를 떠올리세요

찢긴 날개라도 등에 달고

물을 벌컥 마시면서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당신이 훨훨 날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술에 찌들어진 하루를 휘젓습니다



화이트칼라*), 앞으로!

 

 

두루마리 휴지**)가 어느 건물 창밖으로 떨어졌다 함성처럼 춤사위가 퍼질 때쯤 손바닥을 맞댔다

 

손과 손이 만나는 시간은 너무 짧았고 순식간에 틈이 벌어졌다

 

서류 가방을 쥔 손으로도 클랙슨을 울렸다 숨을 들이마시면 먼지가 도로처럼 가라앉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입은 열려 있었다 농도 짙은 미소를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나무의 신장은 샐비어 꽃잎처럼 흩어지고 촌철보다 강한 톱질을 당하고

 

태극기는 부채처럼 펄럭였다

잠에서 막 깨어나도

 

걸걸해진 목을 풀었다 방긋 웃는 화이트칼라가

 

나무 밑동에 호흡기를 달았다

 

독한 맹수보다 날렵해야 해

 

실탄을 줍고 있어도 꽃은 피웠다 죽지 않고 자라는 만남처럼

 

방패를 들었던 진압대원들이

방석모를 벗었다

 

휴지가 코앞에서도 떨어졌다


   *) 넥타이부대의 시작은 19876월 민주항쟁 때부터다. 당시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이 되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사무직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와 시위대에 합류한 모습을 본, 어느 기자가 넥타이부대로 표현하면서 용어가 굳어졌다. 이에 넥타이부대를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당시 3050 화이트칼라 세대를 일컫는 말로도 사용된다.

  **) 거리로 나오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군중을 향해 꽃과 휴지를 던져 응원했다고 한다.



한파(寒破)

 

 

옷을 여러 벌 껴입은 내 손에는 풀리지 않는 열쇠가 나타났다

 

죽은 자들의 암호문처럼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면

나까지 몸이 쇠약해졌다

 

존중이라는 탈출구는 어디에서 부서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뼈도 썩는 것 같았다

 

당신의 소식이 타오르고 문 유리에서도 비치고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처럼 금이 가고 있었을 때 구린내 나는 이불은 옥상에서 펄럭이고

 

바깥 공기를 마셔봐, 나에게 권유해서

내 손이 떨리고 떨린 내 손을 잡은 내 손도 떨렸다

 

추위보다 더 가혹한 고독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쉽게 날아가는 무게가 실린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이름도 모르는 당신이 숨어있었지

 

이제부터 이곳은 시계가 가지 않으므로

 

영원히 안녕, 삶이 알큰하고 싸한 만큼

 

노인네들의 이륙을 뒤따르는 날씨를

나는 한파(寒破)라고 불렀다



잠수함을 꺼내주세요

 

 

애초부터 밤의 거역이란

망가진 수도꼭지를 틀다가 다치는 일

 

나는 그물망에 잡힌 요정이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라도

물어뜯으려다가

 

낮을 꿀꺽 삼키고만 있다

귀스타브 모로가 왜 깍지를 끼는지

깍지 낀 손가락으로 어떻게 습작을 하는지

 

열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어본다

흑연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는다

번개 치는 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나는 귀스타브 모로의 후계자처럼

바퀴의 모양을 떠올리며

손가락 마디를 그린다

 

튜브에 의지할 수 있다면 이불을 덮지 않을 수만 있다면

 

생각은

잠길 수가 없는 꿈의 빈도를 재지 못한다

무슨 문장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내 손이 와르르 뭉개질 때까지

그가 헤엄치던 바다가 범람할 때까지

 

나는 뇌를 배게 밑에 구름처럼 모셔두지만

그의 물집 잡힌 손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귀스타브 모로는 큰소리로 떠든다

 

무얼 어떻게 써나가야 되는가

 

잠수함을 타는 꿈을 꾸듯이

나는 망가진 수도꼭지를 잠그기 위해

이불 덮인 밤을 휘젓는다



인도 델리의 트릭 아트*)-공중부양

 

 

제가 녹색 빛을 삽으로 파내면

당신은 망치질하는 인부처럼

양팔을 앞뒤로 흔들겠지요

 

한쪽 팔이 공중에 뜨지 않나요

 

까맣게 덧칠한 아파트의 입구를 복사할 적엔

눈을 동그랗게 떠야

보름달이 적색 신호처럼 박히는데요

선글라스를 껴도 눈앞은 멀고

장님의 몸속엔 당신의 빨간 입술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요

바닥 위로 굳게 다물어진 숨은

굽이 높은 구두 같아요

 

공중으로 떠오르게 하는 빛을 짜 봐요

허연 기름이 횡단보도처럼 굳어요

 

우리 같이 발을 맞추는 연습을 해요

땅이 바삭거리도록

양쪽 다리까지 기름에 튀긴 뒤에는

절름발이가 되지 않기로 약속해요

눅눅해지면 버려야 하니까요

 

달과 빛 사이의 거리에서는

장님이 클랙슨을 울리는데요

비행기 동체가 쓱 지나갈 때면

아파트 천장에 매달린 신호까지도

우리를 순간 밝혀주네요

 

앞서가던 비행기의 공중 폭발이 아닐까

장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는 바닥에 붕 떠 있어요

우리의 잘못은 아니니까요


*) 흰 선이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착시현상




이름 : 이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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