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도 눈이 달린다면
땅바닥에 뿌리를 내린 당신이 나의 손목을 잡아요
떨어진 꽃잎처럼 귀가하지 못한 채
눈으로만 대화하는 법을 터득한 당신에게서
나는 스쳐지나가는 버릇을 물려받아요
저만치 내 발바닥이 옮겨가는 소리가 들려요
주사위를 굴리고 있거든요
오늘은 어디에 가야 하나요
당신은 가늠할 수 없는 몸에
어린 아이를 들여보내 순수한 영혼을 길러요
동시 속 간단한 구절이 길거리를 장악하면
다시 돌아온 내가 안타까운 눈을 가지죠
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나는 당신의 붉어진 눈을 닦아 눈높이를 맞춰요
어눌한 말솜씨를 몸에서 꺼내
씨처럼 뿌리기 바쁜 당신은 물을 주기 위해
나의 머릿결을 갖고 놀아요
종일 비가 온다는 예보처럼 울음이 쏟아지는 밤
나는 노랗게 부어오른 당신을 안아
어딘가로 반짝이면서 떨어져요
바람에도 눈이 달려있다면
나는 당신을 끌어안아 그림자로 삼을래요
춘기가 올 때마다
근시를 배워버린 나에게 안경을 쓰라는 의사의 처방전이 있었다
나는 귀에 나뭇잎이 들러붙어 흐릿한 글자들만을 아끼고 사랑했다 같은 지붕 아래서 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피하다, 난해한 시어들을 주워 담아내기만 했다
거실에는 수신인을 잃은 편지들이 추위를 타 차가워지고 있었다 엄마는 그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녀의 얘기가 쉽게 풀릴 수식으로 치환되어갔다 나는 안경을 쓰지 않고 방 안으로 피신했다
숨을 곳을 찾던 나는 글자를 다시 쓰기 위해 소싯적 나로 여행을 떠났다 도착한 나는 잘 깎인 연필심을 들고 한글 공책을 펼쳐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심장박동수가 고른 탓일까 삐뚤어진 글자 한 자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사각형 테두리 밖으로 갈겨쓰기 위해 문지방을 나서려 하지 않았다 똑바로 선 글자들을 안고 불가항력으로 지우개에 의해 같이 흩뿌려졌다 엄마에게 답변하다면 털끝으로 이걸 운반하고 싶었다, 익숙지 못한 낯선 계절이 봄비처럼 흩어지는 순간들을
엄마는 내 얘기가 정녕 적나라하게만 들리는 걸까 방바닥에 쌓인 서늘함을 쓸어 모아두기만 하다, 소화되지 못해 속에서 앓던 글자들을 마저 녹여대고 있었다
나는 점점 흩어져가는 엄마 사이에서 팔을 뻗다, 내 몸에 불쑥 매달린 잎과 잎들을 떼어내기 바빴다 이들도 곧 비처럼 떨어지기만을 바라면서
화장품
남자는 윤기 나는 냄새를 뒷받침하기 위해
꽃을 심어두었다
그의 얼굴은 우거진 숲
앙상한 나무들이 진을 치고 있을 때
해가 중천에서 뜨면
미지근한 물로 거칠어진 땅을 세척했다
밤새 길러버린 기름은 공기 중에서 승화되기 직전
숲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남자의 손바닥에는 일찍 깬 애벌레가
빨갛게 곯은 점 하나를 터트려서
진물을 운반하고 있다
에센스를 바르고 있는 남자
손에 최대한 힘을 주며 나무를 두드렸다
딱딱한 껍데기 속에 뿌리가 튀어나오면
말랑해진 살결 위로 크림을 내민다
남자는 속까지 하얀 사람이 되고 싶어
까만 풍경을 적대시했다
숲은 오늘도 잎의 자리를 새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남아 있는 잎들 사이로
브로우가 대신 잎을 달아놓았다
봉오리를 터트리고 있는 꽃들은
멎기 직전의 줄기 위로 립스틱을 칠해두었다
풍경이 화사해질수록
나이를 거꾸로 빼앗겨버린 남자는
눈을 뜰 때마다 성숙된 시선으로 치환되어갔다
귤
천이라도 있다면 창문을 가려놓고 내 멋대로 살고 싶었다
율무차를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에도 귤차를 타 먹고 싶었다
그녀는 계량기 톤 값을 계산할 줄 모르다 달달한 맛으로 나에게 떠넘겼다
사놓은 귤도 없다면서 어디에서 구했어요, 제게 거짓말을 친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껍질을 까서 우리 집안이 말랐다는 실상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란다 그래서 나는 귤을 싫어해, 내가 다 먹고 말거든
신맛이 끝에서 난 걸까 입술이 파르르 떨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나는 찌푸린 눈가를 닦아내었다 닦을 휴지가 없어서 펑펑 울다 다시 닦아내었다 혓바닥에 묻힌 눈물은 그날따라 단 맛이 났다 감귤 주스가 이런 맛이겠거니 싶었다
나는 격차가 오락가락한 수도세를 보며 어머니, 내일도 그럼 주스겠네요 하니 그녀는 귤껍질을 꺼내 씹기 바빴다
떨떠름한 맛이 현실을 도피하도록 해주었다
밤을 달리는 출근길
밤이 긴 팔을 뻗어 별들을 집합시킨다
하늘도 잠을 자야 할 때가 있는 법,
별자리처럼 손발을 묶은 채 이불을 덮는다
오늘은 설사 비가 오진 않을까하며
아빠는 돌연변이로 태어난다
유일하게 색깔을 가지고 기지개를 편다
빛을 잃어버린 달이 산 너머로 숨어버릴 때
밤의 중턱, 가로등 불빛만이
거리를 항해하고 있다
별은 눈물을 흘릴 때마다 비를 뿌려서
예기치 못한 일기예보처럼 어린 나는
매일 밤마다 별똥별처럼
하늘 속을 휘젓고 다닌다
아빠는 나에게 자그마치 이불을 던져놓고
출근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땅 위로 아빠의 발바닥이 착륙한다
철근을 갖다 세운 흙먼지로 저 높이 뜬 해가 추락할 때까지
나는 아빠에게서 무좀을 물려받았다
다시 하늘 속으로 그의 다리가 발사된다
나는 발바닥을 밤 한 구석에 씨앗처럼 심어놓았다
화사한 별빛이 죽어야만 자라는 모양새였다
건너편 세상까지 어둠에 물들기 시작한 아빠의 발자국들
또 다시 출근을 하기 위해 착륙을 서두른다
오늘도 우주에서부터 들려오는 소식통은
하늘이 반짝이는 밤바다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이충기, alfl2382@hanmail.net, 010-2754-7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