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회 창작콘테스트 시 부문 전구 외 4편

by 융융이 posted Jun 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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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

 


 

사람들이 죽는 걸 무서워하는 이유는

세상에 아직 미련이 있어서

라는 당신의 말을 기억합니다

 

민들레 씨앗처럼 세상 곳곳에

미련이 퍼져 싹이 내렸다고,

당신은 유서에 베인 손으로

꺼져있는 전구에 저물어가는 낮을 집어넣으며 말했습니다

 

그 말에 너질러져 있던 이불이 제 몸을 감쌌습니다

이불이 떨어지는 눈물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전구 빛에 닿지 않게 하려고 숨겼습니다

 

당신이 전구에 낮을 넣은 이유,

다시는 낮이 오지 않도록 이라는 걸

당신의 손에서 눈치챘습니다

 

그런 당신의 전구에

어렵사리 구해온 미련을 넣습니다

하지만 미련을 넣은 전구가 당신을

비추기도 전에, 당신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당신을 위해 구해온 미련들을 전구에 갈아 끼며

필라멘트가 끊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당신의 손때가 묻은 유서를 먹으며

그렇게 대신 미련을 채웁니다



엄마

 


 

엄마

새가 땅을 기어가요, 지렁이처럼

그래서 보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엄마

당신의 새빨간 손은

내 눈높이에 맞게 날아다니는데

이상하게 보기가 힘들어요

 

엄마의 손이 내 뺨에 와

닿을 때,

당신은 울고 웃으며 내게 속삭였죠

 

아가야

네게는 빨간색이 어울린단다

아주아주 새빨간색

 

나는 그 말에

뺨에 묻은 빨간색이 무거워

이상한 미소를 지어요

그러면 엄마는 둥그런 미소를 짓죠

 

엄마

오늘도 당신의 손은 날아다니고

나는 바닥을 기어가요

지렁이처럼, 새처럼



빈 집

 


 

오늘도 빈 집에 들어가

 

먼지 위에도 없는 발자국

필라멘트 나간 전구

 

어느 문을 열어도

빛 한줄기 전구에 들어가지 않아

 

엄마를 불러

아빠를 불러

메아리만 침식할 뿐

 

아늑한 먼지가 내 눈을 감싸

그러면 나는 아늑하게 울지

 

나는

오늘도 빈 집에 들어와




봄이 익어가는 과정

 


 

분홍색 꽃잎으로 장식된 나무 한 그루

시간이 바람을 타고 휘날리자

땅에 꽃을 피운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나뭇가지에서 초록의 여린 생명 한 잎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봄이 익어가고 있다는 증거

 

여린 잎에 햇빛을 담아낼수록

봄의 향기가 물씬 풍겨

땅에 피운 꽃에도 향기를 묻힌다

 

이제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봄이 익어가는 향기가 난다




개나리꽃

 

오늘 개나리꽃이 눈에 보인다면

나는 그걸 바로 뭉개버릴 거야

 

미안해, 내 눈은 이미 질투에 멀어버려서

너는 속삭였다 내 눈을 바로 보며

 

그렇지만 움직일 수 없는 걸 쓰레기는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제야 발목에 박혀있는 나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어딘가로 갈 수 없었다

무언가를 밟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입 속에 넣어주는 쓰레기를 씹어 삼켜

맛있게 씹으면 언젠간 개나리꽃도 넣어주겠지

 

그러면 나는 개나리를 바로 뭉개버릴 거야

 

맞잡은 두 손은 차가웠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은 따듯했다

 

사람들의 손이 우리의 입 속에 들어와서 쓰레기를 남겨

개나리꽃 따윈 없는 거야

 

괜찮아, 뭉개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우리는

서로의 손을 뭉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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