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수 엽서
오늘 밤을 날아서
오늘 아침으로 가고 있어
여행 가면 항상 미아가 된다는 상상
그래도 고갱 따라간다면 나는 행복하겠지
우울하다는 한 마디 문장도
해변가 파도에 치여
바스라질 거야
게으른 것이 미덕이며
배고프다는 투쟁을 과즙으로 식히는 곳
안녕, 평안한 하루를 기도할게
룸펜
참을 수 없고 벗을 수도 없는 고치에 갇혔다.
나태와 방종의 접점에 주저앉았다.
컴퓨터에 비밀번호까지 다 입력하고도
엔터를 못누른다.
그 안에 사실이, 내가 마주해야 할,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두렵다.
업무의 짙은 교향곡이 온종일 나를 노크한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로그오프된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도 내겐 큰 용기다.
팔에 묻은 딸기잼 먹으러 누에들이 기어오른다
책상 위엔 빈 캔들이 원망스럽게 서있고
문을 나서면 몇 개 눈들이 나를 굳게 누른다
─돈을 파세요, 자판기 씨.
생계유지의 질긴 막이 호흡을 막고
또 눈이 풀린 채
좀비처럼,
비 그친 저녁
연휴 끝자락엔 비 그쳐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침 못 삼키는 환자 같이
물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도로는 미끄럽고
저녁 맡에 잠시
잠든 도시가 깨어난다
눈 밑에 희망이 눌러붙은 여인들이 거리를 헤맨다
골목 어귀를 막 돌면
오른손에 소주병과 안주거리가 든 봉투를 쥔 아저씨는
참을 수 없이 하루가 버거운 듯 왼쪽으로 고개가 치우친다
도미노처럼 미끄러지며 다니다가
몇 년간 굳게 잠겼던 창고가 헐린 걸 봤다
새로 원룸건물이 싹틀 자리에 하수도가 뚫렸고
주인 아저씨는 빚을 털고 늦게늦게
홀린 듯 다른 도시로 도망갔댄다.
산책하며 걷는 운동장 트랙 위에
근시인 내가 보는 어른들은
다 내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고
누나 같고 사촌형 같은데
운동장 궤도를 벗어나니
저녁 아래로
검은 형체들이 슬슬 움직인다
작은 묘목이나 혀 잘린 마녀 같은 것
자유는 착각이라고 실언했던 친구는
버러지 같아도 직장의 거름 먹고 살아야 된다며
잠깐 입에 불을 머금고 뱉었다.
나는 친구가 직장의 거름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상가에 도착해야 지긋한 상념들이 그친다
네온이 반짝반짝일 때마다 정신도 깜빡거린다.
생기를 잃고 흔들리는 문장들
다 떨쳐버리고 누텔라 발린 와플 먹으러 간다.
응어리
내 슬픈 날들에 고하는 안녕
다시는 오지 못할 것들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날들의 회상이 더 이상 슬퍼지지 않을 만큼
절망하고서야 비로소 그것들에 안녕
이라고 무덤덤하게 인사를 건넨다.
마음은 날갯짓보다도 무겁게 가라앉고 있지만
영혼이 썩고 있는지 성숙하는 중인지 알 수 없지만
더는 응어리진 것 없는 파리한 복수심과
다 식어버린 삶의 열정을 짊어지고
...
떠나야 할 것이다.
공포스러운 순간 속으로 나는
자주 끌려들어가지곤 했다.
천도薦度
솜사탕 달
자정 넘은 밤 가로등
빛 받은 가로수 그림자 타고
이승으로 내려오는 도깨비
도시가 취했고
두둥실 하늘은 알록달록 구름 끼고
골목길 걷노라면
거대한 비석碑石 같은 건물들
원혼도 신령도 서로 끌어안아 키스하는
꽃 핀 밤거리.
천도복숭아 안주로 넥타르 마시는 어른들
정류장 부근에 술상 펴고
고기 구워 스멀스멀 오르는 용구름
껄껄 니캉내캉 농담 오고 가며
첫차로 사람들이 헤픈 졸음을 옮기기 전까지
잔치를 벌이리
요번 술맛은 만족스럽다며
입으로 한기같이 스미어 올리는 새벽.
해가 뜨면 술상도 도깨비도 원혼도 어른들도 신령도 모두 제자리로
김수한
010-8426-3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