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인
새 생명의 울림이 즐비한 날
두려움과 설렘은 짝꿍처럼 함께였다
뱃속에 둥지를 트던 소녀가
또 다른 소녀를 품고선
진통을 헤집고 한 녀석의 길을 밝힌다
아이에게 빛을 선사한 가녀린 소녀의 뱃가죽에
흰머리를 남기고서야
새로운 울림이 시작되었다
기쁨의 눈물은 소녀를 묻어주고
여인을 꽃 피웠다
분명 소녀를 잃고 가는 길이다
하지만 봉선화는 이제서야 꽃을 피웠다
철 거(撤去)
청록 빛 머금은 정승이 높다
온기를 잃은 아파트를 휘어 감고 선체로
잔주름을 들키고 싶지 않은 너에게
푸른 천막은 마지막 옅은 위로가 되리
나란히 등 돌린 나무도 같고
숨결을 숨긴 도로도 같고
문득 허전한 소란이 이는 건 나뿐인가보다
어둑한 밤마다 핀 불빛도 당연하고
가끔 앳된 화음도 당연하고
곧 먼지로 돌아갈 건물의 잔재도
떠나가는 그림자처럼
옷 한 점 남김없이 시간을 덜어가겠지
곁가지의 고드름이 잎으로 떨어지는 가을의 온기는
어느새 겨울의 시선으로 옮아가다
보이지 않는 꽃
잔상을 고이 여민 물꽃이 피었다
빗물의 끈질긴 덧칠이 창가에 물꽃을 피운지 오래
쏟아 붓는 물줄기에 몇 번을 지워도
또 다시 피어난다
차오르는 습기가 안개꽃을 만들면
희미하게 숨죽인 내가 창가에 비친다
잠시 핀 물꽃의 무색한 아름다움을 질투하다가
빗물에 몰매 맞는 창가를 보지 못한 체
나만 슬픈 오늘
도로에 짓이겨진 물방울이
못 본 척 뒤돌아선 연민이 되리라
트레조르 거리
몽상가의 몫이 남은 거리다
한 편의 꿈이 거리에 걸린 작은 예술 박람회
떨 군 머리털로 그려진
하얀 캠퍼스의 공백은 푸른 가지를 뿌리 내린다
뻗어나간 가지에 피어난 꽃이 질 때 쯤
공백은 사라져간다
거리를 가득 메운 그림이
잔상을 남기고 집을 찾을 때
주인 잃은 그림은 수많은 이들의 상상을 피운다
트레조르는 텅 빈 예술이 깨어나는 거리다
꿈이 시작되는 그 섬엔 어제도 오늘도
현실이란 경계가 부서지고 있다
봄
봉긋 오른 흙내음이 살짝 미운 날
이미 퇴비가 되어버린 꽃망울이 그립다
겨우내 잠이 든 흙 위로 마른 잎이 앉고 얹고
숨은 흙이 피부를 드러낼 때까지
잊힐 잎을 수발 중이다
가는 생명이 밟고 간 꽃잎은 푸른 눈을 만들고
곧 피어나 들녘에 다 녹을 때까지 빛을 먹겠지
들판이 새싹에 새로이 취하면
다음 바람에 향을 더해
같은 계절 속에 남을 인연을 찾으리
박민주
010-9637-3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