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차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콘테스트 시 공모 - '마지막 꽃잎 길' 외 4편

by 희희성 posted Dec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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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꽃잎 길



혼잡한 저녁엔 새들이 더욱 환하게 재잘거린다

노파는 자신의 다리보다도

얇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익숙한 거리를 걷는다

누군가는 휘청이는 발걸음이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노파의 발자국이 한 발짝씩 땅에 닿을 때마다

그림자는 악수를 청하듯 뒤를 따랐다

어쩌면 다독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발걸음은 꽃처럼 피어났다


아들은 습관처럼 이사 계획을 말했다

남은 반찬을 홀로 먹는 것보다도

흔들림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 왔다

푸른 달은 노파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 걸려

쉽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어깨동무하듯 줄지어 선 나무들은

주름이라는 흉터로 봄의 풍경을 짰고

지붕 낮은 집들은 자꾸만 거미줄 안에 걸렸다

무엇이 노파의 걸음을 재촉하는 것일까


바람이 주인 없는 편지처럼 배회하는 밤,

기생하듯 붙어 산 시간들은 슬금슬금

그늘을 더욱 깊게 눌러 쓰고

하루를 오르고 내리는 것은

꽃이 피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며

노파가 걸어온 길마다

꽃잎이 춤을 추듯 흩날렸다




웃음이 피어나는 바다 

 


우리 집은 곡선이 익숙해요

파도에 넘실대는 해안선 너머

바다 속을 구경하러 떠나요

한 끼의 새벽이 찾아오면

구름은 자주 공중그네를 탔고

나는 집채만 한 크기의 파도를 삼킨 것처럼

자꾸만 목구멍이 헐떡여요

소라게에 숨은 바닷소리를 햇볕에 말리고

우기의 하늘을 맛보기도 했지요


물고기들은 자주 우리 집 앞으로 찾아 왔어요

나는 부모님 몰래 빗물이 밤새 만든

웅덩이 안에서 헤엄 쳤지요

황금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들은

외딴집 마냥 선 내게 넘치는 바다를 선물해 줬고요

반짝이는 물결을 따라 가면 웃음이 고갯길을 만들어요

엄마는 웃음이 흐르고 넘치면 바다가 된대요


웃음이 물결이 되면

바다도 웃음으로 출렁인다며

나는 옆집 아주머니의 아픔을 고이 접어

바다 너머로 띄워 보내요

이제 흘려보낸 아픔은 웃음이 되어 돌아오고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은 햇살이 되어 반짝일 거예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바다

우리 집에도 웃음이 향기를 묻히고 찾아오겠죠?

나는 오늘도 첨벙첨벙 물장구치며

행복의 물결을 만들어 내는 중이에요




편의점 생존기 

 


어서 오세요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아직도 여자에겐 낯설고 어려운 일이랍니다

여자는 손님들이 이곳저곳

사려는 것들을 구경하는 동안

허리를 직각으로 세우고 벌떡 일어나요

손님들의 날카로운 말에

휘청이듯 제자리에 묶기기도 하지요

과자 두 봉지, 껌 한 개, 담배 한 갑

비닐봉지 속으로 들어가는

오늘의 판매 물품들

일당벌이로 살아가는 여자의 하루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초라해지는 밤, 여자는 홀로 편의점을 지키며

끼니 대신 쏟아지는 잠을 꾸역꾸역 먹어요

집에서는 사치에 대해 배우고

편의점에서는 울음을 먹고 자라는 법을 배웠어요

막다른 길이 나오면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밤하늘도 피곤한지 자꾸만 기울어져요

여자는 오늘 하루도 바코드를 찍어 값을 매기지요

전공서적처럼 두꺼운 여자의 하루 일과

컵라면 용기를 높이 쌓으면

언젠가 높은 하늘을 볼 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여자는 편의점 문이 열리면

잠시 들러다 가는 밤바람에게도 꾸벅 인사해요

밤하늘은 이부자리를 펴고

칸마다 자신의 하루 일과를 정리해요

낯선 이들이 쉼 없이 들렀다 가는 곳,

마주한 웃음과 노고에도

책갈피 하나쯤 있을 거예요

환한 아침의 값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삶을 오르는 법 

  


생라면을 씹듯 오독오독

사내는 틈만 나면 걸음의 수를 세며

가장 안락한 자리를 꿈꿨다

붙박이 가구처럼 건축 현장을 전전하는 서른하나,

다른 이의 집을 짓는 동안

번듯한 집 한 채 가져본 적 없는 밤,

사내의 신발에는 한숨이 먼지처럼 붙어 있다


별들은 설계도 위에 자주 걸렸고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찾아왔다

견디는 법과 오르는 법은

누구나의 과제였다

망치 소리는 잠을 깨우듯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사내는 매일 행복에 대해 노래했다

아무도 귀가하지 않는 동네와

빨간 딱지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감기였다

어째서 집으로 가는 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멀어지는 걸까

별무리는 골목 귀퉁이에서부터 자랐고

밤하늘은 낡은 모포를 머리 끝까지 덮는다

귓가를 타전하는 공사 현장 소리에도

달빛은 충만하고 밤은 깊었다




마지막 밥상



밥 짓는 냄새가 어머니의 굽은 등을 덧칠한다

가난과 한기를 먹고 지낸 동안

배만 튀어나온 아버지

밤하늘에 흩뿌려 놓은 열다섯은

모락모락 잘도 지어졌다

초승달이 밤을 앓던 날

왜 우리는 어머니를 먹고 자랐을까

둥글게 모여 앉아 살림살이에 대해

언성을 높일 때면

우리 집 담벼락도 가난을 두껍게 덧칠했다

로또와 오늘의 운세로 뒷걸음질 치던 흔적들은

댕강댕강 썰어져 나갔다

가난은 밥을 먹다 혀를 깨물었던

여덟 살 때처럼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고

빈집이 된 가족사진에는

단정한 옷차림의 사내가 자꾸만 사라졌다

방 안 곳곳에 묻은 졸음과 간절한 밤

우리는 목덜미를 움켜쥐고

서로의 목소리를 타고 오르는 법을 배웠다

꿈 많고 호기심 많은 동생은

가수가 되어 우리 집을 노래했고

사진가가 되어 집안 구석구석을 눈동자에 담았다

흑백으로 존재하는 우리 집 채널,

나는 바람이 발을 담근 자리 위로

한 번도 귀가한 적 없는 스물다섯을 찾아 헤맸다

오랜 시간 계절을 담아 둔 낙엽 위에

나열된 시간들을 고해성사한다

방영 중인 밤은 온몸으로 집을 짓고

어둠을 머리끝까지 덮은 작년의 봄과 낙엽

세상의 모든 것들은 쉼 없이 흔들리고

어머니의 그림자 뒤로 밤하늘이 한 상 차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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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김희성

이메일 주소 : rlagltjd1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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