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는 틀리지 않았다
네 앞에 새겨져있던 셀 수 없는 발자국들을 너는 보았다
너는 그것들이 너를 그들이 향한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이정표인 줄 알았나보다
겨우내 내리던 눈이 멈추고 초록빛으로 세상이 물들어갈 때가 돼서야
넌 너보다 앞선 삶을 살았던 그들이 남겨놓은 자취가
너를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아닌 너를 흔드는 바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곳으로 향하던 너의 발걸음은 그들을 등졌다
남들이 갔던 곳으로 내딛지 않는 너의 그 고결한 도전 정신에
나는 박수를 보내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치기로 보였나보다
과연 저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본인들도 알지 못하면서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길의 끝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비약이 아니었다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남들이 갔으니 너도 가야 한다는 그 안일한 정신이었다
네가 가는 길의 끝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밟는 길 위로 흘러내리는 뿌듯한 땀방울 하나면
너의 미래에 꽃을 피우기 위한 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때로는 외로운 여정이 될 수도 때로는 힘든 나날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은 허상을 쫓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가끔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넌 틀리지 않았다.
오늘도 역사라는 길 위로 또 하나의 사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너를 난 위로한다
너는 틀리지 않았다.
제목 : 반려
네가 나에게로 달려온다
수없이 지나쳐간 인연들만큼 쌓여온 나를 짓누르는 내 하루의 무게가
너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태양을 마주한 눈발들처럼 사르르 녹아간다
집중하지 않으면 신발조차 제대로 벗지 못할 이 어둠 속에서
자칫하면 우울함의 감옥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할 이 고요함 속에서
오늘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너를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을 짓고 있던 눈이 뜨거워진다
너를 처음 내 곁에 두기로 마음을 먹었을 땐
나는 새로운 인연의 실을 나의 삶 안에 담아둘 수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쌓여가는 시간만큼 변해가는 네 모습을 보고 나서야
달라지는 계절만큼 자라나는 네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너에 대한 존중의 그릇을 더 크게 만들어야 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듯
하루의 끝에 다시 마주한 나의 얼굴을 매만지려 안달을 한다
나의 하루를 색깔로 표현해야 한다면 회색빛깔 크레파스로 색칠해야 할 오늘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너는
나의 오늘의 마지막을 분홍색 물감으로 칠할 수 있게 무던한 노력을 한다
아까의 네가 나에게 그랬듯
이제는
내가 너에게로 달려간다
제목 : 당신께 쓰는 편지
어머니,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봅니다
당신이 계신 그곳의 날씨는 어떠한가요
지금 제가 있는 이곳의 날씨는 두 볼이 붉어질 만큼 차갑고, 손이 아릴만큼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어머니,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봅니다
당신은 제가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전
저를 떠나가셨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아야만 걸을 수 있던 그 아이는
어느덧 당신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쌓이고 있는 저 눈발들과 같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갑니다
어머니,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봅니다
곁에 없다고 해서 변한 게 아닌 것을
함께 있지 않다고 해서 헤어진 게 아닌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저를 잊고 살아가셔도 언제까지고 저를 찾지 않으셔도
저는 당신을 존중할 것입니다
다만, 당신이 어느 때에 나를 찾아왔을 때
당신을 맞이하여 줄 작은 방 하나 정도만 남겨놓겠습니다
어머니, 다시 한번 이름을 불러봅니다
나의 어머니
제목 : 시든 꽃이 다시 피어나기 위해
네가 뿌린 물은,
만개하려던 꽃봉오리를 시들게 만들었다
높게 비상하는 무궁화가 되었어야 할 그 씨앗들은
너에게 향기를 빼앗김으로써
가시 돋친 장미로 피어나게 되어버렸다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 시들어가는 그 꽃들이 아니라
꽃에게 물을 주었던 물주전자임에도
어찌해서 너희들은 마지막 잎새만이 떨어지길 바라는지
흘러가는 구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차츰 떠나가는 꽃의 잎새들이
언젠가는 너희들의 목을 조이는 독초가 될 것임을
언제쯤 깨닫게 될는지
너희들이 모습을 감추어가고 있는 지금도,
우리에게서 피어났던 아름다웠던 꽃은
오늘도 또 하나의 꽃잎을 땅 위에 떨어뜨리고 있다
제목 : 선
너와 내가 헤어지고 난 후
6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선 하나만 넘으면 되면서도
벽 하나를 넘어야 하는 현실에
나는 너에게 갈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얼마나 다르고 또 같을까
지금의 너는 그때의 너와 얼마나 다르고 또 같을까
지금의 나든, 그때의 나든
지금의 너든, 그때의 너든
나는 항상 너와 함께이고 싶었다
너와 나의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었기에
너와 나의 다툼이 잠시 멈춘 것뿐이었기에
나는 너에게 갈 수 없었다
너를 만나 해야 할 말도 너와 함께 나눠야 할 말도
밤하늘에 박힌 별처럼 무수하였지만
아직은 너에게 갈 수 없는 나이기에
난 또 그 말들을 삼키고 만다
이 새벽, 잠 못 들고 있는 나와 같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 앞에 서 있는 나의 아들들을 보며
나는 오늘도 저 문 뒤에 있는 너를 그리워하며
나와 네가 함께할 그 날을 그려본다
성명: 김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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