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
회전목마와 함께 달리는 것들이 있어요
햇빛에게도 굽이 있고 바람에게도 굽이 있죠
오늘도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아이의 웃음과 함께 스커트 자락 날리는 시간과 함께
둥근 원을 그리며
말이 달리고 있어요
들리나요? 우리들의 발굽 소리가, 초원을 달리고 오는 하늬바람의 굽소리가
들리나요? 밤 공기를 흔들며 막 달려오는 저 별의 굽이 반짝이는 소리가
둥근 원이 밤낮없이 달려요
오늘은 무릎이 꺾이도록 달려야 해요
혀에서 갈증이 자꾸만 묻어나와요
발굽에선 피가 꽃처럼 피어나죠
그러나 나는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는 걸 알아요
그걸 아는 게 제일 두려워요
깜깜한 상점과 심야 거리엔 불빛이 없어요
흐르는 음악이 없지만 나는 무섭지 않아요
나는 히잉히잉 달려요 꿈처럼 아늑한 초원을 그리면서
파리지옥, 아버지
우리 집의 파리지옥, 입을 다물어 본 적이 없다
햇빛 잘 비치는 곳에서 구름을 담는다,
구름을 밀고 나오는 달빛을 허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나날들,
휴대폰 가게를 내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나날들,
가게가 파리지옥이다
구두 소리, 들리지 않는 골목마다
직립해 있는 나무들만이 잎사귀를 떨구는 늦가을,
파리지옥은 날파리를 질겅질겅 씹는 소리를 생각한다
파리지옥은 날마다 계약서 쓰는 소리를 생각한다
앞길 막막하다고 먼 데를 처다보고 있는 파리지옥,
허기를 제 몸에 가두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근력 다할 때까지
주름 그어지는 소리가
입가에 이마에 피는지도 모르는
파리지옥, 아버지
나이테
십 년 넘게 기르던 개가 죽었다
검은 개가 죽었다
개 밥그릇만이 개의 이빨을 기억했다
이빨 자국이 만든 얼룩이 반짝거리는 날이기도 했다
나뭇결처럼 거친 피부, 털갈이를 하는 중이었을까
군데군데 붉은 상처를 비치기도 했다
개 밥그릇의 테두리가 닳아가는 동안
뭉툭한 개의 발에선 짚 타는 냄새가 났다
때마침 감나무가 열매를 주고
나뭇가지를 주고 몸통까지 다 내주었듯
개는 개집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먼 기척을 위해 귀를 대문 밖으로 내놓았으리라
주인의 발에 아랫배를 채여도
오직 주인의 그림자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면서 발도장을 찍고 놀았으리라
저 늙은 개의 나이를 세어 본다
개 밥그릇에 박힌 송곳니로 나이를 세어 본다
폭풍과 눈보라가 지나갈 때
나이테 긋는 소리가 들리는 감나무 집,
그 집의 검은 개가 죽자
손톱 때 벗기는 노인도 덩달아 그림자 놓고
산 너머 무덤 속으로 기어들어갔다고 했다
동물 병원 원장의 수첩
애완견은 먹을 수 없다고 쓰여 있다
수첩 안쪽엔 봄밤이 있고
수술대 위의 칼날이 있고 그 손잡이가 있다
물론 피 몇 점이 묻어 있다
한쪽 눈을 잃은 고양이와 한쪽 다리가 잘린 유기견 그러나
원장은 상처를 열고 고름을 빼내고 고통을 붕대로 칭칭 감는다
상처를 째고 꿰매는 일이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애완견들이 안락하게 죽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힘없이 낫는 애완동물의 하루 속으로 들어간다
비가 내리고
볕이 쏟아지는 동물 병원 창문엔 제 살과 뼈를 만지는
비명들이 말라간다
시체와 피와 네 발 달린 유령들이
원장의 수첩 속에서 뛰어다니고 있다 적개심 없이
웃는 유령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애완견들의 표정을 보고 병을 읽어내지만,
수첩 반대쪽엔 병 깊어 죽는 날을 기다리는,
안락사를 시켜야만 하는 살생부가 좀비처럼 웃고만 있다
운동장
철봉에 매달려 물구나무 서는 그림자가 없다
군데군데 파헤친 작은 웅덩이만 있다
웅덩이엔 낮달과 꽁초와 더러움이 잠겨 있다
운동장 한쪽의 풍경이 들어와 살고 있다
웅덩이를 통해, 운동장을 생각한다
운동장은 사실 아이들의 마음에만 있다
축구화를 신고 윽박지르는 비눗방울 같은 아이들
흙냄새 마시고 흙빛으로 자라는 아이들
그러나 운동장은 한참 공사 중이다
인조 잔디를 깔고 있는 운동장엔
연필을 쥐고 수학 공식을 적는 아이가 없다
운동장은 외롭다고 생각한다
학원 안 가고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는
뒤떨어진다고 따돌림 당하는 세상이라고
운동장은 생각하겠지
그런 운동장이 심심해할까 봐
녹슨 시소가 삐꺽삐꺽 운다 캡을 쓰고 모자를 쓴
노인들이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다
웅덩이는 그걸 담아내느라고 눈꺼풀을 끔벅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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