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계절은 같다
봄이 오고
제주에서 시작된 벚꽃의 개화는
파도를 타고 서울을 넘어
3.8선 철책을 넘어
평양을 넘어
마침내 신의주까지 닿았네.
여름이 오고
6.25의 아픔을 아는지
한반도 전역에 장맛비 쏟아지니
백두산 천지물이 낙동강으로 흘러와
제주바다까지 닿았네.
가을이 오고
단풍 무르익은 풍악산에
우리 한민족이 모두 모여
서로의 온기 닿았네.
겨울이 오고
저 하늘 떼 지어 날아가는 북 쪽의 철새들이
평양을 건너, 3.8선을 건너
서울을 건너
마침내 부산에 닿았네.
개기일식
작은 달이 저 큰 해와 일치하여,
해의 모든 것을 가리는 그 찰나의 순간과 같이
작은 내 연정이 저 큰 너의 마음과 일치하여,
너의 모든 것을 뒤덮는 그 기적을 사랑이라 하는가.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그 사랑이,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한 그 개기일식이,
지금에서야 온 것인가.
부끄러워 좋다
높은 산일수록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그 잘난 얼굴 보일까
구름 뒤에 꼭꼭 숨어
더욱 올라가고 싶게 한다.
깊은 바다일수록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그 잘난 마음에 빠질까
닿지 않는 저 먼 곳에 떨어져
더욱 다가가고 싶게 한다.
좋은 사람일수록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그 잘난 행동 들킬까
티 안 나게 사랑주고 마음 주니
더욱 사랑하고 싶게 한다.
이 별
나는 너를 놓지 않았다.
중력의 영향을 받아,
손에 힘이 풀려 놓쳤을 뿐,
너를 놓은 적이 없다.
중력의 영향이 세상의 이치인 듯,
아무리 놓치지 않으려 애써도
결국 너를 놓을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인가.
이별이란 건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이치인가.
정형시
이 삶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구나.
어떠한 인생이 훌륭한 인생이고
어떠한 인생이 엉망인 인생이고
어떤 이가 만든지 모르는 틀에서
이 글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구나.
기승전결 맞춰 쓴 소설의 형식도
서론본론 결론에 맞춰 쓴 논설문도
어떤 이가 만든지 모르는 틀에서
이 시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구나.
반복된 운율과 일정한 문장도
3음보, 4음보 정형화된 형식도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지금의 내 시조차 너무도 일정하게
그 틀에 들어맞게 쓰이고 있구나.
어떤 이가 만든지 모르는 시의 틀이
그 틀에서 벗어나기 두려웠던 나였구나.
폭 우
3월의 봄바람이 불던 날
어디서부터 온지 모를 네가 내려와
나를 살살 어루만져주었다.
그 따뜻한 봄비가 차갑게만 느껴져
네가 오는 걸 싫어했다.
너로 인해 만물이 태어나는 줄 진작 알았다면
너로 인해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네가 오는 걸 싫어하지 않았을 텐데.
저 먼 하늘에서부터 내가 살고 있는 지상으로까지
힘들게 먼 발걸음 한 귀빈인 줄 진작 알았다면
네가 오는 걸 싫어하지 않았을 텐데.
6월이 된 여름날
나의 증오에 흐느끼는 네가 내려와
나를 세차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런 너를 이제는 싫어할 수 없구나.
그러니 이제는 화를 풀고
봄의 그 날처럼 다시 보슬보슬 나를 어루만져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