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진심
사과가 빨갛다는 것도
하늘이 파랗다는 것도
모두 착각이었다
노란 튤립을 한껏 안은 꽃병은
저가 모든 봄을 담았다고 말한다
그것 역시 착각이었다
그날 밤 내가 잡은 네 손은 네가 아니었다
그저 한낱 피부였다
그날 밤 같이 본 검정에는
비참히 깨진 유리조각만 버려져 있었을 뿐
그 어느 하늘에서도 진짜 별은 없었다
네가 내리다
비가 온다
수천수만의 어떤 이들이 온다
내 발끝은 한 여자의 눈물로 젖고
어깨는 어제 부딪힌 남자의 땀방울로 젖는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한 방울은 네 발끝에서 쉬다 왔고
또 다른 방울은 네 어깨를 토닥이다 왔을 것이다
우산 밖으로 손을 뻗어
잘 떨어지고 있는 비를 괜히 쓰다듬어 본다
지금 내 손을 스쳐간 이 빗방울 하나가
내 떨림을 고스란히 안고
언젠가 네 날숨에 닿기를 바라본다
정의 단점
감자의 독이 났다, 방치의 결과
소중한 곳에 넣어 예쁜 진열대에 두었다
나름의 다정이었겠지만
무럭무럭 자란 감자는 이제 먹을 수 없다
이 익숙은 언젠가 너에게서 날 도려낼 것이다
어제도 나는 잠들기 전 습관처럼 전화를 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버릇처럼 전화를 하였다
수신자의 이름은 소중함 그리고 끝이 닳은 번호
이에 나는 이름조차 보지 않고 익숙을 걸고 받는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잃지 말자는 흔한 글귀는
더 이상 내게 매를 들지 않는다
나는 이미 뒤꿈치에 굳은 싹이 나버렸고
사실 지금도 당장 새 신을 사러 갈까 고민하는 중이다
사람은 새것보다 헌 것이 좋다는 엄마
그런데 엄마, 새사람을 사귀면 곧 헌 사람이 돼
이렇게 가슴을 합리화하다가
아니다 그저 헌 것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날 방치하는 네가 밉다는 것이다
홍해의 부재
금붕어 하나가 빨간 배를 내놓고 물 위에 떠 있다
모형 풀들을 헤치고 널 흔들어 깨우지만
빨간 배는 뒤집을 생각을 안 한다
오늘 아침, 나의 금붕어가 죽었다
내 눈보다도 작은 빨강은
어느새 시신경도 모자라 우뇌까지 넘어와 찰랑였고
너의 지느러미로 바삐 일으킨 작은 물보라도
나비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심장에서 몰아치는 해일이 되었다
이윽고 너의 맨드라미는 내 가슴을 간지럽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심해 밑바닥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내 두 다리가 흐드러지는 꼬리로 바뀌려는 찰나
너는 두둥실 힘없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아직 물에 뜨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였다
오늘 아침 죽은 금붕어는 고작 한 줌의 물방울이 아닌
내 온몸을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쳐 이루어진 바다이고
그 바다가 마르면 그때야 비로소 빨강은 진실로 죽는다
하얀 미련
언젠가는 네 얼굴에 가슴에
또 네 손톱에 닿았던 내 손톱
수일 수백일이 지날 동안
어느 날은 빨갛게 행복이 들기도 했고
어느 날은 검게 원망이 들기도 했다
어느새 하얗게 비어버린 손톱은
말라버린 장미 덩굴같이
다 져버린 단풍 가지같이 길어져 버렸다
자를 때가 되었다는 엄마의 말에 따라
마음을 먹고 끊어 내려 한다
애꿎은 어떤 이를 할퀴기 전에
휴식을 바라는 심장을 꼬집기 전에
그러나 얘야, 그것을 너무 깊게 잘라내면
초승 끝에 피가 맺힌단다 엄마가 일러준 대로
체하지 않게 조금씩 잘라 내야 한다
이제는 눈물로 눈물로 손톱깎이를 든다